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13)
獨宿俯溪堂 魏氏墳菴(독숙부계당 위씨분암)
홀로 부계당에 묵으며 장흥 위씨 분암이다.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水鳴夜愈靜(수명야유정)
밤은 물소리 더 고요하고
風吹山更幽(풍취산경유)
바람 부는 산 다시 깊어지네.
一僧先自宿(일승선자숙)
한 스님 먼저 홀로 잠들었는데
明月滿庭秋(명월만정추)
가을 밝은 달빛 가득하네.
옮긴이 注)
*연재중인 장령시문의 위문관련 시는 대부분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지 않거나 검색이 어려운 것을 대부분 최초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시는 여러곳에 이미 소개되어 있지만 '부계당(俯溪堂)'을 소개하기 위해서 올렸습니다.俯溪堂(부계당)은 장천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장천재(長川齋)는 '열락헌(悅樂軒)','부계당(俯溪堂)',추원루(追遠樓),즉휴루(則休樓)등 다른 이름도 여러개 가지고 있습니다.
*분암(墳庵)’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분암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금도 사찰의 형태로 간혹 남아있다. ‘분암’의 ‘墳’은 무덤, ‘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시설이므로 당연히 스님이 머물러 있고, 주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분암은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실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까지도 왕릉과 관련한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세우고 불교적 제의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따라서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도 분암(墳庵)을 세우거나 불교식 상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를 화장하고 난 유골을 모셔두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魏伯珪(영조3년 丁未1727~정조22년 戊午1798) 향년 72
字는 자화(子華), 號는 존재(存齋) 계항(桂港). 본관은 長興. 長興府 古邑坊 桂春洞 출신. 할아버지는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이며 아버지는 진사 위문덕(魏文德)이다. 母는 康津縣 平海吳氏 吳日三의 女이고 配는 金海金氏 金始聲의 딸이다. 子는 魏道立 魏道及이다.
39세 때(영조41년 1765) 을유 식년시 생원 3등 59위(89/100) 했다.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 68세 때(정조18년 1794) 위유어사(慰諭御使) 서영보(徐榮輔)의 啓에 의하여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70세 때(정조20년 1796)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옥과 현감(玉科縣監),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 등을 차례로 지냈다.
학통은 충청도 병계 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실학의 색채가 짙다.
문집은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國譯 存齋集>을 2013년 7월 26일 출간했다.
번역자 注)
호남의 4대 실학자는 순창의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 高靈), 장흥의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長興),고창의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화순의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 晋州)이 꼽힌다.
5대 실학자는 해남의 해금(海錦) 오달운(吳達運 1700~1747 同福)을 포함시킨다.
재치(財痴) 쓰고 옮김...
'장흥 위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杏園光山金氏永慕齋韻 栢林菴(행원광산김씨영모재운 백림암)-모암재(帽巖齋) 위계철(魏啓哲)(1840~1913) (0) | 2017.02.16 |
---|---|
夫山面龍湖亭韻(부산면용호정운)-모암재(帽巖齋) 위계철(魏啓哲)(1840~1913) (0) | 2017.02.03 |
金子里文議官書耕齋韻 成鎬(금자리문의관서경재운 성호)-모암재(帽巖齋) 위계철(魏啓哲)(1840~1913) (0) | 2017.01.31 |
靈光金氏舍人亭韻(영광김씨사인정운)-모암재(帽巖齋) 위계철(魏啓哲)(1840~1913) (0) | 2017.01.30 |
冬夜獨坐(동야독좌)-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0) | 2017.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