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魏나라의 歷史와 遺跡(원산 위정철대부님 밴드글 옮김)

HL3QBN 2015. 10. 1. 20:27

魏나라의 歷史와 遺跡

1. 封土와 大夫
위씨는 은(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문왕(文王) 창(昌)의 후예이다. 무왕 발(發)은 문왕의 장남이며, 희고(姬高)는 열다섯째 아들이다. 고는 형인 발을 수행해서 은의 주왕(紂王)을 멸한 공으로 BC 1046 대부의 작위와 필지(畢地)를 봉토(封土) 받았다. 이로 인해 희고의 성은 희(姬)에서 필(畢)로 바꿔지게 된다.  그래서 희고의 후손들은 이후 희(姬)에서 필(畢)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필고(畢高)의 후예들은 선조의 봉토를 지키지 못하고 서민으로 전락, 흩어졌다. 그러다 후손 필만(畢萬)이 주나라 혜왕(BC 661)때 당진국(唐晉國) 헌공(獻公․676~651)이 위지(魏地)를 정벌할 때 참승(驂乘)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헌공이 BC661년에 필만을「위지」의 대부로 봉하니 그가 곧 위씨의 시조「위필만」이다. 섬서성 예성에 있던 위지는 제후국과 위국으로 발전한다. 시경의 위풍(魏風)은 이곳이다.

閔公元年,冬,晉侯作二軍,公將上軍,大子申生將下軍,趙夙御戎,畢萬為右,以滅耿,滅霍,滅魏,還為大子城曲沃,賜趙夙耿,賜畢萬魏,以為大夫,士蔿曰,大子不得立矣,分之都城,而位以卿,先為之極,又焉得立,不如逃之,無使罪至,為吳大伯,不亦可乎,猶有令名,與其及也,且諺曰,心苟無瑕,何恤乎無家,天若祚大子,其無晉乎,卜偃曰,畢萬之後必大,萬,盈數也,魏,大名也,以是始賞,天啟之矣,天子曰兆民,諸侯曰萬民,今名之大,以從盈數,其必有眾,初,畢萬筮仕於晉,遇屯之比,辛廖占之曰,吉,屯固比入,吉孰大焉,其必蕃昌,震為土,車從馬,足居之,兄長之,母覆之,眾歸之,六體不易,合而能固,安而能殺,公侯之卦也,公侯之子孫(畢萬은 本來 周 畢公高의 子孫)必復其始。[참조] 大有之乾

◇ 安邑古城遺址 : BC 446년 文侯 築城(산서성 인민정부 重占文物保護單位)

  「국풍(國風)」
주남(周南) · 소남(召南)을 정풍(正風)이라 하고, 패풍(邶風) · 용풍(鄘風) · 위풍(衛風) · 왕풍(王風) · 정풍(鄭風) · 제풍(齊風) · 위풍(魏風) · 당풍(唐風) · 진풍(秦風) · 회풍(檜風) · 조풍(曹風) · 빈풍(豳風)을 변풍(變風)이라 한다. 시경에는 모두 15국풍, 160편이 실려 있다. 15국풍이란 황하 유역에 있는 15개국의 가요라는 뜻인데, 사용된 시구에는 방언이 거의 없다. 이것은 『시경』이 성립될 무렵에 공통어로 다시 썼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연애와 혼인에 관한 것이 많고, 다음으로 생활고와 전쟁, 농촌 제사, 수렵 등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 시구가 단순하게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백과사전>

 

장흥위씨 대종회 산하 씨족문화연구소 소장 원산 위정철님의 밴드 글을 옮겼습니다...

 

재치(財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