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四君子와 信陵君 魏無忌(신릉군 위무기)...작성중

HL3QBN 2015. 9. 29. 10:06

四君子와 信陵君 魏無忌

사군자는 예부터 文人들이 餘暇로 一筆法으로 사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四君子란 춘추전국시대에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제나라 孟嘗君, 조나라 平原君, 초나라 春申君, 위나라(大梁) 信陵君을 지칭하며 이를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로 상징한 것이다.
신능군은 魏公子 無忌를 일컫는다. 그는 위나라 5대 소왕(昭王) 위속(魏藗)의 아들로 선비들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에 모여든 선비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 한나라를 창업한 高祖도 뒷날 신능군의 거처를 지날 때는 그곳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答武陵田太守 - 少伯 王昌齡
仗劍行千里 칼을 지팡이 삼아 천리를 가면서
微軀敢一言 천한 몸이 감히 한 말씀하나이다
曾爲大梁客 일찍이 대량 신능군의 손이 되어
不負信陵恩 신능군의 은혜를 저버리자 않으리

사군자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문인화의 기본적 화제(畵題)로 오랫동안 그려져 왔다. 繪畵의 한 장르로 사군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명대의 화가인 진계유(陳繼儒)가 지은 梅蘭菊竹 사보(四譜)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 사군자에 연꽃(蓮), 모란(牧丹), 목련(木蓮), 포도(葡萄), 파초(芭蕉), 소나무를 더하여 十君子라 한다. 文人들이 사군자를 많이 그린 이유는 이 식물들이 의미하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종이, 먹, 붓, 벼루 등 최소한의 도구로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사군자는 水墨畵를 배우는 기초적인 수련 과정에 속한다. 그 까닭은 蘭 잎에서 線의 變化를, 대나무 줄기에서 筆力을 매화 가지에서 構成을, 菊花 꽃잎에서 먹 色의 濃淡의 能力을 배울 수 있는 適切한 素材이기 때문이다. 기법의 습득 단계는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 그림이 먼저 출현하는데, 그 기원을 唐代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北宋의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미 시경(詩經)에서 군왕의 높은 덕망에 비유되어 칭송된 바 있으며, 대숲을 은거지로 자적했던 竹林七賢이나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徽之)의 이야기를 통해 군자의 동반자로 입지를 굳혔다.
한국적 묵죽도의 화풍은 이정(李霆, 1541∼1622)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탄탄한 구성과 꼿꼿한 필력을 바탕으로, 형사(形寫)와 사의(寫意)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화도 대나무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주재로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매화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선비의 절개와 불굴의 정신을 뜻하게 되었다. 특히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 은거한 이후 그 상징성이 더욱 유행하여 선비들이 그림 소재로 즐겼다. 19세기에는 매화그림의 대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여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쓰고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난초는 예로부터 아름다움과 향기가 귀하게 여겨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에서는 충절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공자는 군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묵란도는 난초 그림과 서예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한 김정희(金正喜)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말기 난초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각각 물기 많은 춘란(春蘭)과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내는 건란(乾蘭)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사군자의 중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바로 난인데, 난을 ?그린다 하지 않고 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 번에 난의 잎을 쳐 올리지 않으면 난의 잎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화선지에 번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국화는 가장 늦게 유행하였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또는 묵선(墨禪)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워 묵국도(墨菊圖)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정은 부드럽고 밝은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의 분위기를 내는 담채화를 즐겨 그렸다. 김홍도는 담백한 필치의 수묵화 외에도 계절감이 느껴지는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국화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 하였다. 

 

원산 위정철대부님의 글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