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삼수군수공(휘 천회) 교지■ (1)

HL3QBN 2017. 1. 16. 19:34



<1657 효종 9년, 선략장군행선전관자 종4품 下>

敎旨
魏天會爲
宣略將軍
行宣傳官

ㅇ治十四年十月十三日[印]

●내용 및 특징
1657년(효종 9) 10월 13에 孝宗이 魏天會에게 宣略將軍行宣傳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선략장군(宣略將軍)은 종4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下階 품계이다.

선전관(宣傳官)은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다. 9품부터 정3품 당상관(堂上官)까지 있었는데 초기에는 8명, 후에는 25명으로 증원하여 이를 수석(首席 : 정3품 당상관) 1명, 당하관 3명, 참상관 (參上官) 7명, 참하관(參下官) 14명으로 구분하였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 ?) : 자(字) 여우(汝遇) 호(號)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諱 국보(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 당시 삼수(三水)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편의 제공 및 잘 보살펴 주어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酬唱)하며 보내다가 1669년 종(終)하였다고 수록하였다. (대동보 지장록 p132)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移配)시 편의 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定配) 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 받아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徒刑), 정배(定配), 이배(移配) 등 형벌 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어 정확한 종년(終年)은 알 수 없다. 배(配)는 淑夫人 죽산安氏, 淑夫人 연안李氏이며, 묘소는 행원 江亭中麓乙座이고 1822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配享)됐다.

☞ 公에 대한 행장과 관련 대동보 면주, 지장록, 충의록, 장흥위씨 요람 등 모든 선대 기록에서 "三水府使"라고 수록하였으나, 승정원일기(1664 현종 5년, 3월 12일)에 "三水郡守"로 관직을 제수함이 확인되고, 현존 교지에 의거 차후에는 "三水郡守"로 함이 타당하다.

위의 글은 장흥위씨 대종회 산하 씨족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인 백강 위성록(1968년생, 34세 장천문중 판서공파)이 썼습니다.

삼수군수공(24세)은 저(현동 35세)의 11대 직계 조부님이 되십니다...
위글의 대체적인 행장(이력)의 초본은 제가 작성했으며 족보에는 1669년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등의 자료를 취합 검토한 결과 1683년까지는 생존하신 내용이 있으므로 졸년은 1683년 이후로 판단됩니다.

후손으로써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댓글 부탁드립니다...서로 공부하면서 미진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웠으면 합니다.

재치 위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