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7)
謝魏永興惠葡萄(사위영흥혜포도)
위 영흥부사가 포도를 보내와 예의를 표하다.
오탄(梧灘) 심유(沈攸 광해군 1620 ~ 숙종14년 1688)
不博凉州宦(불박양주환)
장양은 양주자사 바꾸지 않으니
閑看種樹方(한간종수방)
한가하게 나무 심는 방법 구경한다.
翠雲圍寶帳(취운위보장)
푸른 구름 비단장막 두르니
瓊露敵仙漿(경로적선장)
좋은 술 경로는 이태백 음료수다.
忽贈山盤貯(홀릉산반저)
돌연 산골에 챙겨 보내주시니
先令野客嘗(선령야객상)
먼저 시골 손님 맛보게 한다.
驪珠何以報(여주하이보)
보배구슬 무엇으로 갚을까
一嚼潤詩膓(일작윤시장)
한번 깨물자 시상 윤택해 진다.
注)
위영흥(魏永興) - 장흥 위씨 판서공파로 영흥부사를 지낸 위정철(魏廷喆)이다.
不博凉州宦(불박양주환) -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에 환자(宦者) 장양(張讓)이 중상시(中常侍)로 자리를 옮기고 열후에 봉해졌다.부풍(扶風) 사람 맹타(孟佗)가 장양의 감노와 하인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선물을 많이 주었다.감노가 그의 소원을 물으니 맹타가 말하기를 "나의 소망은 너희들이 나에게 절 한 번 해 주는 것이다.(吾望汝曹爲我一拜耳)"라고 하였다.장양에게 청탁하려는 빈객들이 잔뜩 모였을 때 맹타가 뒤늦게 도착하자 감노가 하인들을 이끌고 맹타에게 절을 하며 모시고 들어오니 빈객들이 장양보다 더 위세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맹타에게 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이에 맹타가 그 뇌물을 장양에게 나누어 주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며 맹타를 양주 자사로 삼았다.
驪珠(여주) - 검은 용(驪龍)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전하여 긴요한 문장에 비유한다.
* 심유(沈攸 광해군 1620 ~ 숙종14년 1688) 향년 69
字는 중미(仲美), 號는 오탄(梧灘).靑松人.沈東龜의 아들이다.
31세 때(효종1년 1650) 경인 증광시 병과 14위(24/33)로 급제했다.
현종15년(1674)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仁祖의 繼妃인 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던 서인(西人)을 지지하다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로 귀양 갔다.숙종6년(1680)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한 뒤인 1682년에 다시 등용되었다.
숙종10년(1684)에 대사간이 되었고 그 뒤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비롯하여 참의 벼슬을 두루 역임했다.
간관들이 소론인 윤증(尹拯)을 구원하려 하자 이에 반대했고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 등 노론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 위정철(魏廷喆 선조16년 1583 ~ 효종8년 1657) 향년 75
자(字)는 자길(子吉), 호(號)는 만회(晩悔), 증 판서(贈判書) 위덕화(魏德和)의 아들이다.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나 21세 때(선조36년 1603)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 부사 현감 방어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인조14년(丙子 1636) 영흥부사 겸 방어사(永興護府兼防禦使)에 제수되었다. 죽암(竹菴) 위계문(魏啓文)이 9대조(九代祖)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 위정철(魏廷喆)의 유문을 수습하여 만회당 실기(晩悔堂實記)를 병자년(1936년)에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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