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45권...
밀우(密友) 유유(紐由) 열전에 나오는 '위'자...
제45권(卷第四十五) 열전(列傳) 밀우(密友) 유유(紐由)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 입니다. 현재 국보 제32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참고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1512년 일부 개각(판각)하고 1573년(선조6년) 인쇄되어 옥산서원에 보관중인 전9책 50권의 삼국사기'옥산서원본'(국보322-1호)입니다.
옥산서원본 삼국사기에 '위'자가 제법 나옵니다... 그중에서 10여곳에서 사용된 '밀우와 유유열전'을 올려봅니다...
필사한 것이 아니고 인쇄하여 사용된 '위'자의 인쇄 글씨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습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을 잘 살펴봐 주십시요...
탁마재 재치 위현동...
밀우(密友) 유유(紐由) 열전에 나오는 '위'자...
제45권(卷第四十五) 열전(列傳) 밀우(密友) 유유(紐由)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 입니다. 현재 국보 제322-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참고하고 있는 삼국사기는 1512년 일부 개각(판각)하고 1573년(선조6년) 인쇄되어 옥산서원에 보관중인 전9책 50권의 삼국사기'옥산서원본'(국보322-1호)입니다.
옥산서원본 삼국사기에 '위'자가 제법 나옵니다... 그중에서 10여곳에서 사용된 '밀우와 유유열전'을 올려봅니다...
필사한 것이 아니고 인쇄하여 사용된 '위'자의 인쇄 글씨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습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을 잘 살펴봐 주십시요...
탁마재 재치 위현동...
번역본을 참고로 올립니다...
밀우(密友) 유유(紐由)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는 모두 고구려 사람(髙句麗人)이다.
동천왕(東川王) 20년(246)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와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도망쳐 달아났는데, 장군(將軍) 왕기(王頎)가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고자 하였는데, 죽령(竹嶺)에 이르자 군사의 대부분이 도망쳐 흩어졌다.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곁에 있었다.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긴박하니, 상황으로는 탈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병을 막아보겠습니다. 왕께서는 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마침내 죽음을 각오한 군사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가 힘써 싸웠다. 왕은 간신히 탈출하여 갈 수 있었다.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자,
“만약 밀우(密友)를 데려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에 나와
“제가 살피러 가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전투 지역에서 밀우(密友)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업고서 돌아왔다. 왕은 밀우(密友)를 다리에 눕혔다. 한참 지나자, 비로소 깨어났다.
왕은 사이 길을 통해 이리저리 움직여 남옥저(南沃沮)에 도착하였지만, 위(魏)나라 군대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왕은 계책도 없고 기세도 꺾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가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황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하지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계책이 있으니, 음식을 갖고 가서 위(魏)나라 군사들에게 먹이고, 그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할 수 있다면, 왕께서는 힘써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허락한다.”고 하였다.
유유(紐由)는 위(魏)나라 군대에게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희 임금(寡君)은 대국(大國)에 죄를 짓고 해변으로 도망쳐와 몸 둘 곳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장차 군진(軍陣) 앞에서 장군(將軍)께 항복하고, 법관(司寇)에게 죽음을 묻고자 합니다. 먼저 저를 보내서 많지 않은 음식이라도 가지고 와서 군졸(從者)을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위(魏)나라 장수는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유유(紐由)는 칼을 그릇에 감추고서 앞으로 나가서, 칼을 뽑아 위(魏)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魏)나라 군대는 드디어 혼란에 빠졌다. 왕이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위(魏)나라 군대를 급습하였다. 위(魏)나라 군대는 시끄럽고 어지러워져 진(陳)을 갖추지도 못하였다.
마침내 낙랑(樂浪)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되찾고 전공(戰功)을 논하니,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를 첫 번째로 하였다. 밀우(密友)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유옥구(劉屋句)에게는 압록(鴨綠)과 두눌하원(豆訥河原)을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다. 유유(紐由)에게는 구사자(九使者)를 추증(追贈)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밀우(密友) 유유(紐由)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는 모두 고구려 사람(髙句麗人)이다.
동천왕(東川王) 20년(246)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와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도망쳐 달아났는데, 장군(將軍) 왕기(王頎)가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고자 하였는데, 죽령(竹嶺)에 이르자 군사의 대부분이 도망쳐 흩어졌다.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곁에 있었다.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적병의 추격이 매우 긴박하니, 상황으로는 탈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병을 막아보겠습니다. 왕께서는 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마침내 죽음을 각오한 군사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가 힘써 싸웠다. 왕은 간신히 탈출하여 갈 수 있었다.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을 모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자,
“만약 밀우(密友)를 데려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하부(下部) 유옥구(劉屋句)가 앞에 나와
“제가 살피러 가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전투 지역에서 밀우(密友)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업고서 돌아왔다. 왕은 밀우(密友)를 다리에 눕혔다. 한참 지나자, 비로소 깨어났다.
왕은 사이 길을 통해 이리저리 움직여 남옥저(南沃沮)에 도착하였지만, 위(魏)나라 군대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왕은 계책도 없고 기세도 꺾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가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황이 매우 위태롭고 긴박하지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계책이 있으니, 음식을 갖고 가서 위(魏)나라 군사들에게 먹이고, 그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할 수 있다면, 왕께서는 힘써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허락한다.”고 하였다.
유유(紐由)는 위(魏)나라 군대에게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희 임금(寡君)은 대국(大國)에 죄를 짓고 해변으로 도망쳐와 몸 둘 곳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장차 군진(軍陣) 앞에서 장군(將軍)께 항복하고, 법관(司寇)에게 죽음을 묻고자 합니다. 먼저 저를 보내서 많지 않은 음식이라도 가지고 와서 군졸(從者)을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위(魏)나라 장수는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유유(紐由)는 칼을 그릇에 감추고서 앞으로 나가서, 칼을 뽑아 위(魏)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魏)나라 군대는 드디어 혼란에 빠졌다. 왕이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위(魏)나라 군대를 급습하였다. 위(魏)나라 군대는 시끄럽고 어지러워져 진(陳)을 갖추지도 못하였다.
마침내 낙랑(樂浪)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되찾고 전공(戰功)을 논하니, 밀우(密友)와 유유(紐由)를 첫 번째로 하였다. 밀우(密友)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유옥구(劉屋句)에게는 압록(鴨綠)과 두눌하원(豆訥河原)을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다. 유유(紐由)에게는 구사자(九使者)를 추증(追贈)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장흥 위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유사에 쓰여진 '나라 위'자... (0) | 2024.07.18 |
---|---|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필사본의 '삐침을 뺀 위'자 (0) | 2024.07.13 |
조선 개국원종공신이 확인된 위인주, 위인보, 위신충...1395년 (0) | 2024.06.27 |
중국에서 1500년전에 세워진 장맹룡비에 씌여진 위자... (0) | 2024.06.25 |
당 태종의 거울...위징 (0) | 202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