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선생의 《遠遊日錄》 중 장흥 위씨 관련 부분을 7 회에 걸쳐 연재합니다.-5
《遠遊日錄(원유일록》은 경회 김영근선생이 홍의재 위봉,후포(後圃) 조동겸(趙東謙), 자(字)가 인부(仁夫)인 홍병원(洪秉元), 경회당의 아들 효주(孝柱) 등 다섯분이
1906년 5월 19일 장흥 강진을 떠나 간도로 망명을 가는 여정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그중에서 함경도 신흥군 원평면 우상동의 장흥 위씨 집성촌을 방문한 생생한 117년전의 기록을 올립니다.
(7월)십팔일 청(晴)하다. 성일의 종형 갑원 인보(甲源 鱗甫)가 아침밥을 차려줬다 먹고 난 뒤에 성일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홍의는 그 족인의 상(喪)을 당한 집에 조문을 갔다가 돌아와 함께 낮을 잤다. 깨고 나서 후포, 인부, 효주의 생각이 나서 시를 읊었으니 〈객지에서 헤어지니 하루가 일 년 같은데 차가운 시내 고목에 매미가 운다. 북녘 사람이 객을 범처럼 두려워하는데 어느 곳 산방(山房)에서 편하게 잠자느냐(旅地相分日抵年 寒溪古木有鳴蟬 北人畏客如逢虎 何處山房得穩眠)〉, 〈삼인은 노동을 하되 이인은 편안하니 밤마다 사람이 밥 먹기를 잊는다. 산수의 구경은 고사하고라도 다른 풍속을 새로 보지 않는가(三人勞動二人安 宿宿令人却忘餐 山水遊觀姑舍是 得無異俗契辛觀)〉 했다.
위린보(魏鱗甫) 위정진(魏楨震) 위생진환(魏生晉煥)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달이 올라서야 돌아가고, 누우려는 참에 성일이 술과 배를 가지고와 각기 몇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 위봉(魏棒 철종14년 1863 ~1943) 향년 81
長興魏氏 30世 안항공파, 字는 대언(大彦), 號는 弘毅齋, 진사 영이재 위문덕의 5대손. 존재공의 아우인 상암공(諱 伯昊)의 현손으로 방촌 출신이다.
父는 魏世祚, 母는 金海金氏 金俊譯의 女. 冠山 古下面 桂春里生. 강진 오남 김한섭 선생의 제자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보낸 간찰 6통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술합방 후 翌年 3월 가족을 이끌고 間島 和龍縣 西城村 南陽情舍에 정착했다.墓는 미상. 配는 해남윤씨다.대동보 3권 124페이지. 일반적으로 '봉식'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족보에는 '봉'(1863∼?)으로 되어 있다.
*경회 김영근(1865~1934)선생은 구한말 강진 태생의 유학자이다. 조선 후기의 격동기와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조선의 선비이다.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평생을 '위정척사'와 '항일호국'의 정신 속에서 살았다. 김영근은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자 1906년과 1913년 두 번에 걸쳐 간도 망명을 결행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후에는 후학들을 길러내는 한편, 인도공의소 등 유림 조직의 일에 적극 참여하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김영근 문집 등 서적 29권 및 유묵13점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에 있다. 2013년 9월 25일 강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문화방송(MBC) 'PD수첩' PD와 제20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장, 제8대 제9대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출신으로 현재는 대전MBC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김환균이 그의 증손이다.
장흥위씨 족보 자문 : 호산 위신복 장흥위씨족보편찬연구위원
탁마재 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