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위천회

HL3QBN 2016. 4. 14. 23:15


  • 현종 1년 (1660년 順治(淸/世祖) 17년 년 6월 21일

  • 魏天會爲全南右水虞候


  • 현종 4년 (1663년 康熙(淸/聖祖) 2년 7월 26일

  • 都摠都事魏天會


  • 현종 5년 (1664년 康熙(淸/聖祖) 3년 3월 12일

  • 魏天會爲三水郡守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1월 7일
  • 前三水郡守魏天會等罪狀 죄상에 대해 義禁府가 拿處하기를 청하는 刑曹의 계목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1월 7일
  • 魏天會則時在全羅道長興地. 魏天會 등이 지방에 있으므로 羅將을 보내어 拿來(나래,죄지은 사람을 잡아옴)하겠다는 義禁府의 계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2월 4일
  • 魏天會 등을 刑推(형추,형장(刑杖)으로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죄를 심문하던 형벌)할 것을 청하는 義禁府의 계목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2월 5일
  • 魏天會가 贓法(장법,장물(贓物)에 관한 법규)에 저촉되었으므로 依法處置할 것을 청하는 咸鏡監司의 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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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2월 12일
  • 魏天會를 本府에 투옥하고 아직 照律하지는 않았다며 처치에 대해 묻는 義禁府의 계 宋時喆, 以義禁府言啓曰, 以咸鏡監司狀啓, 因刑曹粘目, 前三水郡守魏天會, 令本府處置事, 允下矣。魏天會之殺獄掩置事, 方囚繫本府, 未及照律。咸鏡監司狀啓私用綿布濫取貂蔘之罪, 別爲問目, 捧招後稟處,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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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3월 11일
  • 尹善道를 移配할 때 藍輿軍을 調給한 守令을 現告하는 刑曹의 啓目, 刑曹啓目, 罪人尹善徵[尹善道]移配時, 藍輿軍調給守令, 罷職現告, 前三水郡守魏天會, 前甲山府使慶一會, 前北靑判官南夢星, 洪原縣監李明彬, 咸興判官鄭河, 前永興府使李益達, 高原郡守李商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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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 7년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5월 15일 義禁府에서 魏天會를 龍川府에 定配(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는 형벌)함

  • 현종 9년 (1668년 康熙(淸/聖祖) 7년 2월 18일 郡守·魏天會등은 등은 褒貶(포폄,조선시대 관리의 근무성적 평가제도. 포는 포상, 폄은 폄하(치적이 나쁜 관원을 좌천시켜 배척하는 것)를 뜻) 등급을 논하지 말라고 吏曹와 兵曹에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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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 13년 (1672년 康熙(淸/聖祖) 11년 윤 7월 22일 魏天會가 현재 任所(임소,지방 관원이 근무하는 곳)에 있으므로 羅將을 파견하여 잡아오게 할 것을 청하는 義禁府의 계

  • 현종 13년 (1672년 康熙(淸/聖祖) 11년 9월 3일
  •  龍翼 曰,昨日禁府魏天會公事, 當初以更査回啓, 而自上有刑曹文案取見之敎, 故卽爲取見, 則與原情, 大異矣。上曰, 以故, 令取見矣。龍翼曰, 魏天會情狀, 可疑, 似當直爲請刑, 而始刑之後, 則事涉難處, 故請更査矣。

  • 현종 13년 (1672년 康熙(淸/聖祖) 11년  9월 8일
  • 以義禁府言啓曰, 魏天會, 更招, 辭連各人等, 竝只拿來, 一處推覈事, 判下矣。

  • 현종 13년 (1672년 康熙(淸/聖祖) 11년 9월 26일
  •  魏天會의 刑推公事 처리에 대해서 논의함.
  • 南龍翼曰, 魏天會刑推公事, 入啓, 而尙未判下矣, 見姜永哲等元情, 則魏天會, 殺人情狀現露, 永哲等, 別無可問之事, 未知何以爲之。上曰, 魏天會, 受刑三次, 而無他語, 然後永哲等, 可以議處。上曰, 點穴時疲困矣。
  • 현종 15년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2월 9일
  • 魏天會 등의 加刑을 청하는 義禁府의 계목
  • 魏天會, 刑問十二次, 丁炯十八次不服, 加刑。啓依允。
  • 현종 15년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2월 11일
  • 又啓目, 丁炯刑問十九次, 魏天會三十三次, 竝不服, 加刑。啓依允。
  • 현종 15년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5월 11일
  • 疏決할 때 義禁府, 罪人 魏天會 등의 처벌을 정함
  • 疏決時, 禁府罪人魏天會, 減死(감사,사형에서 형벌을 감하여 주는 일)定配(정배,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는 형벌)

  • 현종 15년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5월 12일
  • 義禁府에서 魏天會 등의 처벌 내용을 아룀
  • 禁府, 魏天會海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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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 15년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5월 12일
  • 減死定配罪人 魏天會의 유배지를 잘못 정했다며 配所元單子 중에 다시 付標해서 들이겠다는 義禁府의 계
  • 禁府啓曰, 昨日疏決時, 減死定配罪人魏天會, 定配於全羅道海南縣, 今已啓下矣。今聞魏天會, 家在長興, 去海南一日程云, 當初臣善瀓, 不能致察, 不勝惶恐, 配所元單子中, 改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禁府謄錄   
  • 숙종 1년 (1675년 康熙(淸/聖祖) 14년 1월 16일 
  • 魏天會事, 進讀。上曰, 仍配。
  • 숙종 1년 (1675년 康熙(淸/聖祖) 14년 7월 10일
  • 次讀魏天會事。上曰, 罪犯甚重, 不可輕施, 仍。
  • 숙종 5년 (1679년 康熙(淸/聖祖) 18년 7월 13일
  •    慶尙道魏天會·李翔·崔愼·宋時烈·南勇賚, 上曰, 竝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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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 7년 (1681년 康熙(淸/聖祖) 20년   4월 10일
  • 慶尙道罪人魏天會, 鼎重曰, 此因妬忌而殺人, 減死定配者矣。上曰, 減死之類, 亦有減等者矣。萬重曰, 已往減等之類, 未免失之太輕, 況此殺人重罪, 豈可輕減乎? 上曰, 仍。

  • 숙종 8년 (1682년 康熙(淸/聖祖) 21년 12월 2일
  • 魏天會, 上曰, 魏天會, 減死定配者也。
  • 숙종 9년 (1683년 康熙(淸/聖祖) 22년 5월 27일
  • 魏天會를 같은 도내에서 移配하라는 判付를 받고 당초의 定配單子에 付標하여 들이겠다는 義禁府의 계
  • 義禁府啓曰, 以刑曹啓目, 魏天會得萬, 擊錚回啓判付內, 纔已從自願移配之後, 旋因其子之呼訴, 還配於前配之所, 揆以政體, 實涉未妥。所當勿施, 而觀其所辭, 亦甚可矜, 令該府, 仍其道內移配事, 判下矣。魏天會當初定配單子中, 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 숙종 9년 (1683년 康熙(淸/聖祖) 22년 11월 18일
  • 疏決에서 義禁府의 徒年罪人 放秩者 및 門黜罪人의 명단
  • 疏決時, 禁府徒年罪人放秩, 魏天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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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 ?) : 자(字) 여우(汝遇) 호(號)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諱 국보(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그는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 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公은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 그런데 당시 삼수(三水)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편의 제공 및 잘 보살펴 주어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酬唱)하며 보내다가 1669년 종(終)하였다고 수록하였다. (대동보 지장록 p.132)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移配)시 편의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定配)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 받았으나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徒刑), 정배(定配), 이배(移配) 등 형벌 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어 정확한 종년(終年)은 알 수 없다. 배(配)는 淑夫人 죽산安氏, 淑夫人 연안李氏이며, 묘소는 행원 江亭中麓乙座이고 1822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配享)됐다.





    醉睡軒公(天會) 行狀

     

    삼수군수공 휘 천회(天會·1629~????)의 자는 여우(汝遇) 호는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휘 국보(國寶)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공을 보고 무과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공은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족보에는 1663년으로 기록) 그런데 당시 삼수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잘 보살펴줬으며 광양으로 이배시에 남여군 제공등의 편의를 봐줬는데,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하며 보내다가 1669년 졸(卒)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지장록 p.132)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시 편의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 정배 이배등 형벌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樊噲不死 張飛復生(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였으나 한 많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早年弓劒意猶深 나이 어릴 때 활과 칼에 뜻이 깊었는데

    湖海風聲動遠林 호수와 바다의 바람소리에 먼 숲이 움직이네

    退倚層欄依斗立 물러나 층계의 난간 기대고 북쪽의 별은 의지하니

    誰知夜夜望京心 누가 밤마다 서울을 바라본 마음을 알리요

     

    ※ 취수헌공의 시를 보면 관직에서 물러남이 몹시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대개 당시의 관리들은 억울하게 퇴진할 경우 다시 복직시키는 사례가 많았음으로 공도 또한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밤마다 층계의 난간에 기대어 북쪽의 별과 서울을 응시하면서 세월을 보낸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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