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곡(思悼曲)은 필사본 위강정시고(魏江亭詩稿)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가사 작품이다
■思悼曲 제목 아래에 (丙子年 五月二十一日 失六歲兒 故以中悼之 名峻良)이라고 써있다.
뜻은 “병자년(1936) 오월 이십일일 여섯 살 난 아이를 잃었다. 고로 마음으로 그를 애도한다. 이름은 준량이다"
※본 작품(思悼曲)은 준량이란 6살 된 아이를 잃고 지었다고 보인다.
■위강정시고 제작시기 추정
위강정시고 제작시기 추정 알성가(謁聖歌)
무진년(1928)임을 알 수 있으며 “戊辰年春三月日暖風和고百花滿發이라” 로 시작하고, 원문의 33쪽부터 해당된다.
?오른쪽은 겉표지이다. 판독을 해야 하며 가사문학관에서는 판독을 하지 않았다.
■판독
客問ㅇ余曰主人之ㅇ號江亭可乎
曰然客曰奚取爲曰古人或以景而乃
ㅇ其不忘規矩于身者也余則取之義在爲杏園
吾書梓里而江亭在ㅇ杏北而吾七代祖考三水公之壽
藏之處也吾汞公生存之日建亭于江水之南篇之
以醉睡二字蓋憂憫不遇與同志娛樂酬唱以終
餘ㅇ之討而公之没後厯數百年則江水淸之日夜鳴
流兼亭墟寥之四時自在隨風如縷者門前栁也載
月若盤者庭上梧也一乾松ㅇ兩露而
老ㅇ叢竹凌
(雪)霜而立一般若待主人翁之帰而亭之不平安
亦在ㅇ百年荷矣噫公之才行施不能圓滿逢時不幸
若此哉故吾仰慕之亦如公之憂憫也客聞之良久
曰主人之心寔出景慕之切欲復其業之未就者也
■판독 교정본
客問於余曰主人之(稱)號江亭可乎
曰然
客曰奚取爲(焉)
曰古人或以景慕而乃欲其不忘規矩于身者也
余則取之 義在焉
杏園
吾之梓里而江亭在於杏北而吾七代祖考三水公之壽藏之處也
吾三水公生存之日建亭于江水之南 篇之以醉睡二字
蓋憂憫不遇與同志娛樂酬唱以終餘年之計而公之没後歷數百年則江水淸淸日夜鳴流兼亭墟寥寥四時自在
隨風如縷者門前柳也
載月若盤者庭上梧也
一幹松ㅇ兩露而老
(数)叢竹凌雪霜而立
一般若待主人翁之帰而亭之不平安亦在數百年前矣
噫公之才行施不能圓滿
逢時不幸若此哉
故吾仰慕之亦如公之憂憫也
客聞之良久曰主人之心寔出於景慕之切欲復其業之未就者也
■최종 판독
客問於余曰主人之稱號江亭可乎
曰然
客曰奚取焉
曰古人或以居地或以景慕而乃欲其不忘規矩于身者也 余則兼取之義在焉
杏園吾之梓里而江亭在於杏北 而吾七代祖考三水公之壽藏之處也
吾三水公生存之日建亭于江水之南 扁之以醉睡二字
蓋憂憫不遇 與同志娛樂酬唱以終餘年之計
而公之没後歷數百年 則江水淸淸日夜鳴流 亭墟寥寥四時自在
隨風如縷者門前柳也 載月若盤者庭上梧也
一幹松冒雨露而老 數叢竹凌雪霜而立 一般景色若待主人翁之歸 而亭之不平安亦在數百年前矣
噫 公之才行之施不能圓滿 逢時不幸 若此哉
故吾仰慕之亦如公之憂憫也
客聞之 良久 曰主人之心寔出於景慕之切欲復其業之未就者也
< 해설 >
손님이 내게 “주인께서 호를 강정(江亭)이라 한 것이 옳은가?”하고 물었다.
(내가) “그러하다” 하고 대답했다.
손님이 “어찌 그렇게 했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내가 답했다.
“옛사람들은 사는 곳이나 경모하는 것을 가지고 몸에 잊지 않고 법도로 삼기를 바랐습니다.
행원은 저의 고향이고 강정은 행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의 칠대조부이신 삼수공께서 길이 묻혀 계시는 곳입니다. 우리 삼수공께서는 살아계실 때 강의 남쪽에 정자를 지으시고 취수(醉睡)라는 두 글자로 현판을 다셨습니다.
(이것은) 대개 시절을 만나지 못함을 근심하고 동지들과 즐겁게 놀고 시구를 주고 받으며 여생을 보낼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수백 년이 지났는데 강물은 푸르게 밤낮으로 소리 내며 흐르고 정자의 터는 적막하여 사철 그대로 있습니다.
실같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것은 문 앞의 버드나무이고 쟁반처럼 달을 이고 있는 것은 뜨락의 오동나무입니다. 한 그루 소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아 늙고 몇 포기 대나무는 눈과 서리를 이기며 서 있습니다. 경치가 모두 주인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듯하고 정자가 평안하지 못한 것도 수백 년 전의 일입니다.
오호라, 공의 재주와 덕행이 원만하게 펼쳐지지 못하고 불행한 때를 만난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앙모하고 또 공의 근심을 함께 합니다. (*약간 불확실합니다. 如로 읽은 부분이 접혀 있는데, 직접 책을 갖고 있으면 다시 확인해 보세요.)
손님이 이 소리를 듣고, 이윽고 말했다.
“주인의 마음이 실로 경모가 간절하여 그 사업을 이루지 못한 것을 회복하려는 것에서 나온 것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