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1876년(병자년) 무과 장원(??) 위달원(魏達源)...

HL3QBN 2026. 1. 11. 21:56
1876년(병자년) 무과 장원(??) 위달원(魏達源)...

며칠전에 장흥위씨 마지막 소과(생원진사시,사마시) 입격자 위정식( 36세 관북봉규파)에 대해서 조사하던 도중에 위정식의 아버지 위달원의 행장에서 무과장원이라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장흥위씨에서는 처음 보는 내용으로 갑자기 관심이 갔습니다.

위달원(魏達源)
35世 관북봉규파, 1835~1884
1999년 기묘대동보 6권 197페이지
자(字)는 성해(聖海)요 호(號)는 야초(野樵)니 을미생(乙未生)이며 병자(丙子)에 무과장원(武科壯元)하여 관(官)은 호군(護軍)이다. 갑신(甲申) 7월16일에 종(終)하니 묘(墓)는 운전덕리곤원(雲田德里坤原)이다. ○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니 부(父)는 주부용매(主簿用邁)요 졸년미상(卒年未詳)이며 묘(墓)는 운남면구탄리건원(雲南面舊灘里乾原)이다. ○ 배(配)는 여산송씨(礪山宋氏)다.
 

장원(壯元/狀元)은 과거 제도 가운데 대과(大科)의 문무과 전시(殿試)에서 갑과(甲科)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일입니다. '장원급제'는 오직 문무과에만 사용하는 표현으로 잡과에는 장원 급제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무과에 첫째로 급제한 자는 '무괴(武魁)'라고도 합니다. 또한 차석(2위)로 급제한 사람은 방안(榜眼), 또는 아원(亞元)이라고 부르며 3위는 탐화랑(探花郞)이라고 호칭합니다.

위달원의 생년이 1835년이므로 병자년은 1876년입니다. 그런데 당시 발행되었을 급제자 명단이 있는 무과방목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조사하다보니 간혹 1876년 무과 급제자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해에 과거가 있었다고 봅니다. 급제자중 대표적인 사람이 우범선입니다. 민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일본에 망명중 살해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우장춘박사입니다.

위달원은 무과급제후에 바로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승정원일기 1878년 4월 29일 내용중에 '咸興座首, 出身魏達源'이 나옵니다. '함흥좌수(함흥향청의 우두머리) 출신(과거는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 위달원'이라 해석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승정원일기 1878년 6월20일에 '副護軍(부호군) 魏達源' 임명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후에 다른 내용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위달원의 아들 위정식이 1888년 진사에 입격했는데 당시 사마방목에는 위정식의 아버지 위달원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감하(永感下 입격 당시 양친 모두 별세)의 기록으로 위달원은 1884년 돌아가셨고 마지막 품계와 직책은 절충장군(정3품) 용양위 부호군이 맞을 것 같은데 족보 기록에는 '호군'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888년 진사시 입격자 위정식을 추적하다가 그의 아버지 위달원이 무과장원이라는 놀라운 일을 알게되었는데 아직 정확한 사실 확인은 안되었지만 장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대단함이 있습니다. 위달원의 아버지는 흡곡현령 위종곤이며 위종곤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진보현감 위적철입니다. 위적철의 아버지는 강동현령과 남포현감 위광진이며 위광진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 연천현감 고원군수 기장현감 남포현감 위홍조(위흥조)입니다. 그리고 위달원의 7대조는 관북 최초의 족보를 발행하기 위해 동부서주 한 통천군수 위정상입니다...참으로 어마어마한 집안 내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용중에 틀렸거나 더 자세한 자료나 관련 내용이 있으면 제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자문
호산 위신복 족보편찬연구위원회 간사위원

장흥위씨도문회 부회장
탁마재 재치 위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