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이괄의 난(1624년)과 그 400년후...

HL3QBN 2024. 12. 17. 20:53
이괄의 난(1624년)과 그 400년후...

지금부터 딱 400년전 1624년 1월 24일 조선땅에서는 실로 엄청난 이괄의 난(갑자란)이 있었다...

물론 그 400년후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근3년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렬이 비상계엄을 발령했다...

계엄령(戒嚴令)이란
국가의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그 지역은 사법권 및 행정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계엄 사령관이 행사할 것을 국가 원수가 선포하는 명령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는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다. 그런면이 기찰정치로 나타났다. 기찰정치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여 고변, 모함하는 것으로 정적 제거에 많이 이용되었다...

반정에서 출중한 공이 있었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이 있었지만 부원수로 임명되어 당시 최전방이었던 평안도의 방어를 담당하며 조선 최정예군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괄이 역모를 꽤하고 있다는 고변으로 이에 대한 해결과정에서 이괄이 결국 급하게 반란을 일으켜서 최정예군을 이끌고 조선의 도성인 한양을 점령했고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몽진했다...

그렇지만 이괄군은 한양의 북쪽에 위치한 안현(무악재)전투에서 최정예의 이괄군은 한양 백성들이 도성의 성곽위에서 지켜보는 와중에 전투에서 패했으며 결국 한양도성 문이 잠기면서 도주했으나 부장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이괄에게 준 15,000명의 조선 최정예병을 잃으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초기 방어에 실패하게 된다. 또한 이괄의 패잔병들이 여진족에 투항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고, 여진족의 조선 침입 시 길잡이 노릇을 했으니, 결국 이괄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빌미를 만든 셈이 되었다...

이번 윤석열의 난에서도 한국군 최정예 특전사 소속의 제1특전여단과 707특임대, 수방사와 정보사등의 소속 병력들이 투입되었다...

400년전의 이괄의 난이 미쳤던 정치적 군사적 여파가 현재 2024년에 윤석열의 난에서도 군의 사기 저하 및 핵심 인력 누출등 국군의 전력 저하가 염려된다...

마지막으로 이괄의 난에 대한 진압의 공으로 장흥위문에서는 진무원종일등훈에 병조참판공(휘 정철 22세 판서공파) 남포현감공(휘 정보 23세 괴봉공파) 두 분의 선조께서 훈록되었다.

탁마재 재치 위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