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제주도 위혁만청덕선정비 魏赫萬淸德善政碑

HL3QBN 2023. 10. 22. 08:40

제주도 위혁만청덕선정비 魏赫萬淸德善政碑

위혁만청덕선정비
魏赫萬淸德善政碑

시대 ; 조선
유형 ; 선정비
위치 ;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2리 도로변. 의귀초등학교 서쪽 새가름교를 지나 과수원 비닐하우스 앞에 있었는데 2008년 운지오름 동쪽 아래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는 비석받침돌이 6개, 비각 지붕이 4개 있는 것으로 보아 6개 이상의 선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황구하 어사의 선정비와 위혁만(魏赫萬)현감의 선정비만 남아 있다.

이곳에 선정비들이 남아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귀리에는 조선초부터 의귀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광해군원년(1609) 판관 金緻의 동서방리 신설로 정의현 中面이 생길 때부터 1925년 남원리로 면사무소를 옮길 때까지 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라는 점이다.

위혁만 현감의 선정비에는 앞면에만 글씨가 있는데, 가운데에 '縣監魏公赫萬淸德善政碑'라고 되어 있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盡必奉公政令明信 惟國是務治理庶平 澤被魚獸公乎公乎 德治民生千載不忘'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7cm, 너비 40cm, 두께 15cm이며, 받침돌은 가로 90cm, 세로 63cm, 두께 35cm이다.

정의현감 위혁만은 1716년(숙종42) 3월에 도임하여 1718년 4월에 이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전력하고 정치상의 명령은 확실한 소식이니 누가 나라를 이처럼 힘써서 다스리는 일이 청렴하고 공평하였는가! 물이 세차게 솟아나와 고기에 미치는 것처럼 공평무사하시니 인덕이 백성들에게 널리 미쳐 고르게 실어 잊지 아니하리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위혁만은 퇴관(退官) 후 정의현 가시리에 정거(定居)하였다고 2005년 旌義郡誌는 기록하고 있다.

위혁만의 묘는 1999년 기묘보에는 장흥 마치(장동 배산과 만년사이의 재로 감나무재로 불림)에 있었으나 조부되시는 해남현감공(휘 천상 24세)과 함께 지금은 행원리뒷편의 장흥IC와 예양강(탐진강)의 사이에 있다,

공의 기록은 장흥위씨족보 1999년 기묘보의 지장록 p.1024~1025 「通訓大夫行寶城郡守公事實」에 의하면 公의 諱는 赫萬이요 字는 華卿이니 魁峯先生 諱 大用의 玄孫이요 縣監 諱 天相의 막내아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성군수공의 관직 이력은 백강 위성록 족보연구위원회 총무위원이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①1696년(숙종 22) 6월 22일 아산만호, ②1705년(숙종 31) 2월 28일 임치첨사, ③1707년(숙종 33) 5월 11일 부호군, ④1710년(숙종 36) 12월 3일 겸내승, ⑤1710년(숙종 36) 12월 21일 낙안군수, ⑥1716년(숙종 42) 1월 23일 정의현감, ⑦1721년(경종 1) 7월8일 진해현감, ⑧1722년(경종 2) 1월 22일 경복궁 가위장, ⑨1723년(경종 3) 3월 14일 군산첨사, ⑩1724년(경종 4) 1월 28일 잉임사승전, ⑪1725년(영조 1) 3월 21일 부호군, ⑫1725년(영조 1) 12월 4일 보성군수, ⑬1726년(영조 2) 6월 2일 단부부호군, ⑭1728년(영조 4) 1월 11일 법성첨사 등 1731년까지 35년간 관직에 재임하면서 관직제수(官職除授), 의금부나인(義禁府拿因)사실, 서용(敍用), 전교(轉交), 장계(狀啓) 등 30건의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는 많은 종친들이 보성군수공의 후손이다.제주도 입도조(개척조)는 보성군수공의 차손자 휘 재우공과 삼손자 재정공(휘 재안)이다.

현재 장흥위씨를 위해 건립되어 발견된 선정비는 2기(다른 하나는 무안군 해제면 임치첨사 선정비)이며 2기 모두 보성군수공의 선정비이다.

탁마재 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