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성씨 성 "위" 한자의 해명서
본글은 위광종 행원문중 문회장님이 쓰신글을 대신 게재하여 줄 것을 의뢰 받아 대신 올립니다.
우리의 성씨 성 "위" 한자의 해명서
신헌 위광종(36세 행원문중 문회장)
우리의 족보 초보가 발행된 때는 영조24년 1759년 기묘년에 발행되었습니다. 그때의 임원록에 도유사였던 장천문중의 안항공후 25세 영의재공께서는 수년전부터 우리 씨족의 족보를 기획하여 첫번째 족보인 기묘초보를 편찬하게 되었읍니다.
영의재공의 발문을 보면 (영조 18년) 기묘초보 발행전인 1741년 즉 18년전에 미리 서문을 준비 해놓은 것으로 보면 족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구상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의 상황으로 교통편이 불편함에도 각 문파별로 연락을 취하고 가승을 취합하고 계파의 원로들과 회의를 소집하여 의견을 일치하여 족보편찬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장흥위씨문중의 성과 였다고 봅니다.
영이재공(1704-1784)께서는 그때가 55세로 연로한때입니다 아들인 옥과현감공 존재 위백규선생은 젊은나이로 주축이 되어 족보를 기획한 것으로 기묘초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묘초보의 간판인 표지에 보면 “長興魏氏 族譜 崇禎三 己卯 俯溪堂 刋板”이라고 되어있는데 우리의 성씨 위자가 삐침이 없고 맡에는 반대 디긋자로 똑똑히 표기되여있습니다. 이것은 기묘초보를 편찬하면서 기묘초보의 표지에 기록된 우리의 성씨는 성위자로 확정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중국의 “위"나라 위씨성을 탈피해 우리만의 성 “위" 자를 만들어 독특함을 구현하기 위해서 구대 에서부터 성 “위”자를 만들어 왔는데 1759년 기묘초보에서 확실하게 성 “위"자로 확정했다고 봐야 맞을것이고 그후2차 임인보 1842년(6책), 3차 계미보 1883년 (9책), 4차 병진보 1916년(11책), 5차 정유보 1957년(3책), 6차 임자보1972년 (6책), 7차 기묘대동보 1999년 (8책)으로 7번에 족보를 발행했는데 모두가 우리의성 “위”자로 기록되여 후손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이번 7현조 대제때 제향이 끝나고 총회를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문헌으로 표시되어 있는데도 현재의 불편한 사항만 가지고 가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습니다. 가부를 논해야할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묘초보의 내용에서 위자를 자세히 보면 부변의 밑 반대 디긋자부분은 약자로 삐침으로 약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위자로 보면 안됩니다.
이러한 확실한 문헌으로 왈가왈부해서는 안되고 장흥위씨도문회에서 추진하고있는 족보편찬위원회에 모든 것을 위임하고 해당분야에 모든 시스템에 우리의 성 “위”씨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도록 위임하여 응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글은 위광종 행원문중 문회장님이 쓰신글을 대신 게재하여 줄 것을 의뢰 받아 대신 올립니다.
우리의 성씨 성 "위" 한자의 해명서
신헌 위광종(36세 행원문중 문회장)
우리의 족보 초보가 발행된 때는 영조24년 1759년 기묘년에 발행되었습니다. 그때의 임원록에 도유사였던 장천문중의 안항공후 25세 영의재공께서는 수년전부터 우리 씨족의 족보를 기획하여 첫번째 족보인 기묘초보를 편찬하게 되었읍니다.
영의재공의 발문을 보면 (영조 18년) 기묘초보 발행전인 1741년 즉 18년전에 미리 서문을 준비 해놓은 것으로 보면 족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구상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의 상황으로 교통편이 불편함에도 각 문파별로 연락을 취하고 가승을 취합하고 계파의 원로들과 회의를 소집하여 의견을 일치하여 족보편찬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장흥위씨문중의 성과 였다고 봅니다.
영이재공(1704-1784)께서는 그때가 55세로 연로한때입니다 아들인 옥과현감공 존재 위백규선생은 젊은나이로 주축이 되어 족보를 기획한 것으로 기묘초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묘초보의 간판인 표지에 보면 “長興魏氏 族譜 崇禎三 己卯 俯溪堂 刋板”이라고 되어있는데 우리의 성씨 위자가 삐침이 없고 맡에는 반대 디긋자로 똑똑히 표기되여있습니다. 이것은 기묘초보를 편찬하면서 기묘초보의 표지에 기록된 우리의 성씨는 성위자로 확정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중국의 “위"나라 위씨성을 탈피해 우리만의 성 “위" 자를 만들어 독특함을 구현하기 위해서 구대 에서부터 성 “위”자를 만들어 왔는데 1759년 기묘초보에서 확실하게 성 “위"자로 확정했다고 봐야 맞을것이고 그후2차 임인보 1842년(6책), 3차 계미보 1883년 (9책), 4차 병진보 1916년(11책), 5차 정유보 1957년(3책), 6차 임자보1972년 (6책), 7차 기묘대동보 1999년 (8책)으로 7번에 족보를 발행했는데 모두가 우리의성 “위”자로 기록되여 후손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이번 7현조 대제때 제향이 끝나고 총회를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문헌으로 표시되어 있는데도 현재의 불편한 사항만 가지고 가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습니다. 가부를 논해야할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묘초보의 내용에서 위자를 자세히 보면 부변의 밑 반대 디긋자부분은 약자로 삐침으로 약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위자로 보면 안됩니다.
이러한 확실한 문헌으로 왈가왈부해서는 안되고 장흥위씨도문회에서 추진하고있는 족보편찬위원회에 모든 것을 위임하고 해당분야에 모든 시스템에 우리의 성 “위”씨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도록 위임하여 응원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설명 : 1759년 장흥 부계당(장천재의 다른 이름)에서 최초로 발행된 장흥위씨족보 기묘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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