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문화현령공(23세 諱 山寶 괴봉공파) 행장에 대해서...

HL3QBN 2018. 3. 3. 19:44



문화현령공 행장에 대해서....docx


문화현령공(23 山寶 괴봉공파) 행장에 대해서...

 

財痴 위현동(35 행원문중 괴봉공파)

2017년 추석에 흥미로운 영화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남한산성인조 14(1636) 병자호란, 명과 오랜 선린관계 중인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거절당한 청이 대군을 이끌고 바람처럼 압록강을 넘어와 이에 임금과 조정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12 14일부터 이듬해 1637 1 30일까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김훈의 원작소설을 소재로 펼쳐진 이 영화의 압권은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과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의 한치도 물러섬 없는 어전회의 광경이다. 하지만 끝까지 관심 갖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람했지만 나오지 않은 장면, 아니 꼭 나왔으면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인조 15(1637) 정월 초하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중에

비국 낭청 위산보(魏山寶)를 파견하여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서 새해 인사를 하면서 오랑캐의 형세를 엿보게 하였는데, 청나라 장수가 황제가 이미 왔으므로 감히 마음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며 공갈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산보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전쟁중에 술과 고기를 들고 확실히 승기를 거머쥔 적군진영에 들어갔다가 공갈(恐喝 공포를 느끼도록 윽박지르고 을러댐)하는 말을 듣고 다시 고기와 술을 가지고 돌아왔다라는 것은 아무리 맡은 임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담력과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임무수행이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능력의 출중함을 인정받아 그 임무를 수행한 위산보는 누구인가? 그분의 행적을 쫒아가면서 궁금한 점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문화현령공(23 山寶, 1593~1656)은 군자정(軍資正) 홍주(弘宙)의 아들()이요 형조 참의(刑曹參議) 대용(大用)의 손자(孫子)이니 기우(氣宇)가 굉위(宏偉)하고 언론(言論)이 영창(英暢)하였다.호는 망미당(望美堂)이다 음서(蔭敍 선조의 음덕(蔭德)에 따라 그 자손을 관리로 서용하던 제도) 1609(광해 2)에 봉훈랑 군자감 판관 역임 후에 투필로 광해군 12(1620무과에 급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 등을 역임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때 선전관(宣傳官)으로 왕을 호가(扈駕)하면서 비변사 낭청으로 적진인 청군진영에 왕래하면서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한 동궁(東宮, 소현세자)과 봉림대군이 심양에 불모로 갈 때도 호종했다. 공은 난리 후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에 록()되고 이듬해인 1637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졸 후  1822(壬午)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됐다. 이상의 내용은 족보, 충의록등의 기록을 종합한 것이다.

 

문화현령공의 행장 내용중에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1. 17세때인 1609년 봉훈랑 군자감 판관을 제수 받은 교지가 있다.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2. 투필(投筆 문과에서 무과로 전환)하고 무과에 급제했는데 당시 시대 상황은 어떠했는가?

3. 병자호란 후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에 록()되었다는데 과연 그럴까?

4. 1637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는데 어떤 연유로 취임치 않았을까?

5.  망미당(望美堂)이다, 그뜻은 무엇일까?

 

1. 17세때인 1609년 봉훈랑 군자감 판관을 제수 받았다.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대동보 면주(面註)를 보면 14(1606~1607년으로 예상)에 음사(蔭仕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함)軍資監判官하며 광해(光海) 경신(庚申) 1620년 투필(投筆 : 문과에서 무과로 전환) 등과(登科)하여 라고 수록되어 있다.1609(광해 2) 7 12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承訓郞守軍資監判官 魏山寶에게 奉訓郞軍資監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의 사진이 남아 있다승훈랑(承訓郞)은 정6품 동반(東班) 문관에게 주던 하계(下階) 품계이고, 판관(判官)은 여러 관서의 종5품 관직이다. 관직이 품계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자를 붙였다. 봉훈랑(奉訓郞)은 종5품 동반(東班) 문관에게 주던 하계(下階) 품계이고, 군자감 판관은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은 군자감에 소속된 종5품 관원이다.

문화현령공이 최초에 받은 관직은 14세 전후에 承訓郞守軍資監判官으로 추정된다.하지만 실직(實職)이 아닌 산직(散職)으로 보인다.산직은 실직처럼 관직을 주지만 실제 근무처가 없는 관직이다.  산직중에서도 영직(影職)으로 영직(影職)은 직함만 있고 실제로 관직에 근무하지 않은 관직으로  녹봉도 과전(科田)도 없다.이를 借銜(차함)이라고도 한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공의 조부이신 괴봉공( 大用 21)이 임진왜란의 공으로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았지만 당시 지역내에서 위세가 상당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괴봉공이 돌아가시기 전에 영직이지만 봉훈랑(奉訓郞)으로 품계가 올라갔으며 군자감 판관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확실한 증거도 있다. 그것은 1620년 무과 등과시 받은 홍패(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급제증서) "判官 魏山寶"라고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투필(投筆 문과에서 무과로 전환)하고 무과에 급제했는데 당시 시대 상황은 어떠했는가?

문화현령공과 남포현감공(23 廷寶, 1596~1644,호는 退憂堂) 형제가 무과에 급제한 1620(광해12) 경신정시무과의 급제자는 5,000여명이다.원래 무과의 정원은 28명이지만 통상 무과는 30~50명을 선발하는데 5천여명을 선발한 것은 당시 대단위 병력이 필요한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미 1618년에 시행된 무과에서도 3,200여명이 급제했다. 그것은 임진왜란과 이후에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과 명이 맞서면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긴장관계 조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무과 급제자 대량 배출의 배경이다. 무과(武科) 병과(丙科) 1793인으로 급제하였다.

한꺼번에 1,000명 이상을 뽑는 무과를 만과라고 하였다. 또한 전란을 전후로 군사 체제가 와해되자 부방군(赴防軍 조선 시대에 다른 지방의 병력이 서북 변경의 국경 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맡아보던 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무과의 광취를 지속시키는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더 큰 규모의 광취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뽑힌 만과 출신을 ‘출신군관(出身軍官)’이라 하였는데 군관의 임무를 띠고 변방에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부분의 출신군관들은 일정기간 부방의무를 마치면 귀향했다.하지만 문화현령공과 공의 동생 남포현감공의 경우에는 과거급제후 왕명의 출납을 수행하는 선전관, 도총부도사등의 경관직과 현령과 만호,현감의 외관직을 두루 제수 받은 것은 시대적인 상황을 볼 때 두분 모두 뛰어난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3. 병자호란 후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에 록()되었다는데 과연 그럴까?

결론은 병자호란은 승전이 아닌 패전하였으므로 책록된 훈록은 없다.그렀다면 호성정사일등훈(扈聖靖社一等勳)이라고 전해지는 훈록은 무엇일까?

호성훈(扈聖勳)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훈록이다. 정사훈(靖社勳)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1623)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록이다.그러므로 1593년 출생하신 문화현령공은 호성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사훈(靖社勳)은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까지 관련된 증거는 없다. 또한 호성과 정사 두개의 훈록을 합쳐서 사용된 예도 없다. 더욱 연구와 확인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28차례에 걸쳐 책봉된 공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0~50여명 정도였다.이렇게 적은 수의 공신책봉에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는 방식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다정식으로 공신에 책봉된 사람이 정공신(正功臣)이라면, 준공신(準功臣)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개국공신의 원종공신은 1 6백 여명이 넘었으며,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후방에서 지원한 공로에 대한 선무원종공신의 경우는 9천여명이다.원래 원종의 원은 중국에서는 쓰지만 명태조 주원장의 원이라 조선에서는 글자를 꺼려 으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준공신이었기에 정공신에 준하여 책봉이 되었다.

정공신이 결정된 이후 녹훈도감에서 주관을 하였으며, 명칭은 정공신 대표명칭 다음 원종을 더했다.원종공신도 정공신과 마찬가지로 1, 2, 3등 으로 구분하여 포상을 달리 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공신을 둔 이유는 불안한 상황에서 국가와 왕실에 조금이라도 공로가 있는 모든 유공자들을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빌고자 함이었을 것이며 명예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4. 1637년에 문화현령(文化縣令)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귀향,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는데 어떤 연유로 취임치 않았을까?

1637 628일 승정원일기의 내용중에 위산보는 심양에 있을 때 사복시 주부에 옮겨 제수되었고 지금 방답 첨사에 차임되었는데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병자호란직후 16372 8일 한양을 출발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일행이 볼모로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갈 때에 문화현령공이 소현세자 일행을 선전관으로 배종한것이 확실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집필한 연려실기술 25권에 수록된 내용중에 가함 대신(假銜大臣)에 남이웅(南以雄), 대빈객(大賓客)에 박황(朴熿), 부빈객(副賓客)에 박노(朴), 무재(武宰)에 박종일(朴宗一)ㆍ이기축(李起築), 보덕에 황일호(黃一晧), 겸보덕에 채유후(蔡裕後), 필선에 조문수(曺文秀), 겸필선에 이명웅(李命雄), 문학에 민응협(閔應協), 겸문학에 이시해(李時楷), 사서(司書)에 서상리(徐祥履), 겸사서에 정뇌경(鄭雷卿), 설서에 유계(兪棨), 겸설서에 이회(李檜), 익위에 서택리(徐擇履)ㆍ양응함(梁應涵), 사어(司禦)에 허억(許檍)ㆍ김한일(金漢一), 부솔(副率)에 이간(李旰)ㆍ정지호(鄭之虎), 시직(侍直)에 이헌국(李獻國)ㆍ성원(成遠), 세마(洗馬)에 강문명(姜文明), 사복시 주부에 정이중(鄭以重), 선전관에 위산보(魏山寶)ㆍ변유(邊宥)ㆍ구오(具鏊), 부장(部將)에 민연(閔埏), 의관에 정남수(鄭楠壽)ㆍ유달(柳達)이 배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심양으로 배종한 이후 심양에서 1637 3월에 사복시 주부에 제수되었고 622일 방답첨사에 제수되었음을 교지와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조 18(1640) 49일에는 도총경력(都摠經歷) 제수되었으나 계속해서 선전관의 임무를 수행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해 12 27일 승정원 일기의 내용중에 위산보를 문화현령에 제수하는 내용이 있다현재 문화현령 제수 교지의 행방을 알 수 없으나 교지의 사진이 남아 있어서 확인이 가능하다이러한 자료로 족보와 충의록에 기록된 1637년은 맞지 않고 1640(인조18)에 문화현령 제수가 타당하다. 또한 인조 21(1643) 4 6일 승정원일기 내용중에 문화현령공의 거취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전지(傳旨상과 벌에 관한 임금의 뜻을 해당 관청이나 관리에게 전하여 알림)에 부사(府使) 조정호(趙廷虎),현령(縣令) 위산보(魏山寶) 220여명(중복자 포함)을 서용(敍用 죄가 있어 벼슬을 박탈했던 사람을 다시 임용)하고, 강등된 자급(資級 조선 시대 관리의 품계)을 도로 주고,직첩(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서)을 도로 내주고 지난 신사년(1641, 인조19)과 임오년(1642)의 춘하등 포폄(春夏等褒貶)과 추동등 포폄(秋冬等褒貶)에서 중()을 맞거나 하()를 맞은 사람은 모두 논하지 말도록 이조와 병조에 내리라.”하였다.

포폄법(褒貶法)전최(殿最)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해서 포상과 처벌에 반영하던 인사행정 제도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자급(資級 관리의 위계)마다 일정한 기간을 근무해야만 1()씩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이를 사만승자(仕滿陞資)라 한다. 그러나 사만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승자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자되기 위해서는 고과 성적과 포폄 성적이 좋아야만 하였다.

 백관의 고과표(考課表)는 매년 말에 경관(한양 근무 관리)은 이조가, 외관은 관찰사가 작성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그리고 이는 각 해당 관아의 당상관과 제조(提調)가 매긴 포폄 성적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포폄의는 포상을 의미하고은 폄하(貶下)를 의미한다. 경외관에 대한 포폄은 매년 6 15일과 12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경관은 해당 관청의 당상관과 제조 및 육조 중 속조(屬曹)의 당상관이, 외관은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상의해 포폄을 행하게 되어 있었다. , 제주(濟州) 3읍만은 제주목사가 등제를 매겨 관찰사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포폄제도는 태종 때부터 실시되어오기는 했지만대체로 세종 때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사만자(仕滿者)의 고과 성적과 포폄 성적은 매년 6월과 12월에 실시되는 도목정(都目政 또는 都目政事라고도 함. 매년 2회 또는 4회씩 이조와 병조에서 행하던 인사행정)에 반영되었다.이 때 포폄 성적이 십고십상(十考十上)이면 1자를 올려 받고,십고이중(十考二中)이면 무록관(無祿官)에 서용되었으며,십고삼중(十考三中)이면 파직되었다.그리고 오고·삼고·이고의 경우에는 일중(一中)이면 더 좋은 관직으로 갈 수 없었고 이중이면 파직되었다.특히 당상수령(堂上守令)은 일중만 되어도 파직되었다.이와 같이, 포폄법은 관리들의 근만(勤慢)을 직속 상관이 상정(詳定)하게 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의 명령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실시된 인사제도였다. 포폄은 관리들의 업무 수행과 기강 확립을 위한 제도인 만큼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공정성이 무너지고 이치에 어긋나거나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 승정원일기 내용중에도 포폄 계본(조선시대 국왕에게 중대한 일로 올리던 문서양식) 내용에는 근무 평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징계를 청한 것이 많았다.

따라서 이날의 전지는 대부분 포폄에 의해서 또는 파출을 요청해서 파직된 관리들을 다시 서용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164012월 문화현령에 제수되고 취임하였으나 1642년에 포폄의 결과로 억울하게 문화현령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므로 문화현령공이 1637년에 문화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1643년 이후에 확인된 기록이 없어 공의 거취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는 1643년 서용 이후 귀향하여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타당할 것 이다.

설명: http://postfiles14.naver.net/MjAxNzEyMTBfMzkg/MDAxNTEyOTA2MTIxMzg0.W7kTPpMbPPKhy10B7-PyK8GmAtGpVfkTFNw6IaEZ_Wgg.ijlMtfZGYcXvYwrqx75ZGLWBArQO2Kn-W5SQUVdav-Ug.JPEG.wsr061/1478612442873.jpg?type=w580

 

5.  망미당(望美堂)이다, 그뜻은 무엇일까?

문화현령공의  망미당(望美堂)이다, 망미((望美)는 “임금을 바라본다” 또는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도리로 여겼고 그 도리를 잊지 않게 항상 임금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그리 붙였을 것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속미인곡(續美人曲)의 미()도 임금을 뜻했고 임금을 생각하며 읊은 것이다. 이러한 '()'는 왕조시대 임금을 미칭(美稱)한 대유(代喩)가 된다.

조선은 충효를 숭상한 성리학을 지배사상으로 받드는 국가였다. 이런 국가사상을 철저히 따랐고 그것이 가장 옳은 선이라고 여겼던 공의 정신과 국제적인 혼란기에 청의 수도였던 심양과 조선의 한양을 왕래했던 선전관이요 외교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공의 뛰어난 임무수행력과 기상을 더욱 연구하고 본 받아야겠다.

마지막으로 문화현령공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기록을 우연하게 발견했다. 공은 영광 정씨(淑人靈光丁氏)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동생(남포현감공 廷寶)에게서 杏亭公( 天樞)계자(양자)로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자손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하지만 광주이씨 십운공파 장흥계열의 족보 기록중 14李松龍의 행장 내용중에 配長興魏氏父縣監山寶墓在浦谷 无育이라는 기록이 있다. “부인은 장흥 위씨, 부친은 현감 위산보이다. 묘는 포곡에 있고 낳아 기른 자식은 없다.”정도로 읽을 수 있다. 이 기록 외에 아직 확인된 사실은 없다. 우리에게는 없다. 하지만 다른이들에게는 있다. 기록은 항상 중요하다. 어떤 선조께서 남기신 것이 한글자만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풍부한 상상이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상상도 불가능하다.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의 중요성을 오늘 또 한번 되새김질 해 본다...


문화현령공 행장에 대해서....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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