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29)
述懷(술회)
회포를 적다.
-덕암(德庵) 위석규(魏錫奎)(1883 ~1913)
人事有巨纖(인사유거섬)
인사는 크고 작고 있으나
天理無損添(천리무손첨)
천리는 덜고 더하고 없네.
棲遟迷春冬(서지미춘동)
한가하자 봄 겨울 헷갈려
何有世凉炎(하유세양염)
염량세태 어떡하나.
和氣春化添(화기춘화첨)
화기는 봄 재촉하니
妙理秋毫纖(묘리추호섬)
묘리는 가는 가을털이네.
優遊雖卒歲(우유수졸세)
소요하다 해 마치더라도
其奈崑岡炎(기내곤강염)
곤강 불타면 어찌하려나.
獅子山下室(사자산하실)
사자산 아래 집은
妖氣飛不添(요기비불첨)
요기 날아 아니 보태네.
嗟爾呴呴鷰(차이구구연)
아, 네 제비 지저귀지만
竈突方上炎(조돌방상염)
굴뚝 불나 이제 뜨겁겠지.
注)
崑岡炎(곤강염) -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다 같이 재앙을 당함을 비유한 말로 [서경(書經)]에 "곤강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 다 타 버린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다.
竈突(조돌) - 나라가 잘못됨을 모르고 있음을 풍자한 말이다.가의(賈誼)의 상소에 "굴뚝이 무너져 기둥이 불에 타고 있어도 들보에 사는 제비는 어미와 새끼가 즐거워하기만 한다." 했는데 여기서 인용한 말이다.
魏錫奎(고종15년 1883 ~ 1913) 향년 36(옮긴이 注 저자는 1878년이라 기록했으나 장흥위씨 보첩과 여러자료를 참고하면 1883년에 출생하신 것 같습니다.) 字는 여장(汝章), 號는 덕암(德庵). 본관은 장흥(長興)이다.족형 홍의재 위봉과 안양 기산 백봉흠에게 수학했다.증조부는 위도방(魏道昉)이고 조부는 위영집(魏榮集)이다.아버지는 위윤조(魏胤祚)이며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옮긴이 注 장흥 위씨 보첩의 내용을 참고하면 4남4녀로 되어있습니다.)
어머니 친정은 용산 상금으로 수원백씨 집안인데 외할아버지는 백정수(白貞洙)이다.외가 선산은 전라도 장흥군 용산면 풍길 마을 용소등(龍沼嶝)에 있다.
1905년(광무9)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고 나아갔으나 이후 면암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906년(광무10) 중국으로 떠나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朴泰文,姜明運,鞠思成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니콜라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묘는 니콜라스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장천재 입구에 1989년 의열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숭령이 짓고 글씨는 광주시 이돈흥이 썼다.
번역자 注)
젊은 날 중국사서 주자서물을 이해할 정도로 학문이 앞서 간 것 같다.시와 행간에는 우국탄세(憂國歎世)의 언사(言辭)가 있어 지사(志士)의 위의(威儀)가 보인다.만주 연해주 광야에 구국의 길로 나서지 않았어도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것 같다.삶이란 가정도 없어 헛된 망상이지만 한마디 말을 남긴다.위 열사의 용산면 상금리 외가는 필자(김규정)의 외가이기도 하다.큰 외숙 白光均이 풍길 선산을 잘 수호하고 성실하게 제사도 받든다.
옮긴이 注)
덕암공 諱 석규(錫奎)는 저자는 1878년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1883년 태어나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저자는 장흥 위씨 30세, 청계공파,아버지는 효자송의 주인공 윤조(胤祚)와 어머니 수원(水原) 백씨(白氏)의 장남으로 1883년 관산 당동(堂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라가 열강의 각축으로 매우 어지러울 때 나서 성장했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매우 강한 그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 의정서체결, 을사보호조약체결로 사실상 국권을 잃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피가 끓어올랐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파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면암 최익현이 반대운동을 벌이다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했다. 이를 보고 공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불과 24세(1906년)의 청년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유서와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물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동지들과 합류했다. 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병을 데려오고, 식량을 조달하는 일에서부터 명망가들을 찾아가 운동에 동참을 권유하기도 했다. 몸을 혹사한 나머지 병을 얻어 고향을 떠난 지 고작 7년만인 1913년 4월 27일 이국타향 러시아 니콜라이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옥천 위욱량과 덕운 위황량등이 공의 손자이다.
(자료제공 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 위신복 연구위원)
재치(財痴) 쓰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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