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26)
呈鄭斯文 眞九(정정사문 진구)
정 사문 진구에게 드리다.
-덕암(德庵) 위석규(魏錫奎)(1883 ~1913)
天冠山下玉林舍(천관산하옥림사)
관산 천관산아래 옥림정사 있어
仙杖逍遙又是春(선장소요우시춘)
신선 의장대 소요하니 다시 봄이네.
請君今日先何事(청군금일선하사)
묻건대 그대 오늘 어떤 일 먼저 하나
衛正斥邪第一人(위정척사제일인)
유교 도의 지킨 위정척사 제일인이네.
魏錫奎(고종15년 1883 ~ 1913) 향년 36(옮긴이 注 저자는 1878년이라 기록했으나 장흥위씨 보첩과 여러자료를 참고하면 1883년에 출생하신 것 같습니다.) 字는 여장(汝章), 號는 덕암(德庵). 본관은 장흥(長興)이다.족형 홍의재 위봉과 안양 기산 백봉흠에게 수학했다.증조부는 위도방(魏道昉)이고 조부는 위영집(魏榮集)이다.아버지는 위윤조(魏胤祚)이며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옮긴이 注 장흥 위씨 보첩의 내용을 참고하면 4남4녀로 되어있습니다.)
어머니 친정은 용산 상금으로 수원백씨 집안인데 외할아버지는 백정수(白貞洙)이다.외가 선산은 전라도 장흥군 용산면 풍길 마을 용소등(龍沼嶝)에 있다.
1905년(광무9)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고 나아갔으나 이후 면암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906년(광무10) 중국으로 떠나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朴泰文,姜明運,鞠思成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니콜라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묘는 니콜라스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장천재 입구에 1989년 의열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숭령이 짓고 글씨는 광주시 이돈흥이 썼다.
번역자 注)
젊은 날 중국사서 주자서물을 이해할 정도로 학문이 앞서 간 것 같다.시와 행간에는 우국탄세(憂國歎世)의 언사(言辭)가 있어 지사(志士)의 위의(威儀)가 보인다.만주 연해주 광야에 구국의 길로 나서지 않았어도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것 같다.삶이란 가정도 없어 헛된 망상이지만 한마디 말을 남긴다.위 열사의 용산면 상금리 외가는 필자(김규정)의 외가이기도 하다.큰 외숙 白光均이 풍길 선산을 잘 수호하고 성실하게 제사도 받든다.
옮긴이 注)
덕암공 諱 석규(錫奎)는 저자는 1878년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1883년 태어나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저자는 장흥 위씨 30세, 청계공파,아버지는 효자송의 주인공 윤조(胤祚)와 어머니 수원(水原) 백씨(白氏)의 장남으로 1883년 관산 당동(堂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라가 열강의 각축으로 매우 어지러울 때 나서 성장했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매우 강한 그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 의정서체결, 을사보호조약체결로 사실상 국권을 잃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피가 끓어올랐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파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면암 최익현이 반대운동을 벌이다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했다. 이를 보고 공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불과 24세(1906년)의 청년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유서와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물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동지들과 합류했다. 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병을 데려오고, 식량을 조달하는 일에서부터 명망가들을 찾아가 운동에 동참을 권유하기도 했다. 몸을 혹사한 나머지 병을 얻어 고향을 떠난 지 고작 7년만인 1913년 4월 27일 이국타향 러시아 니콜라이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옥천 위욱량과 덕운 위황량등이 공의 손자이다.
(자료제공 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 위신복 연구위원)
재치(財痴) 쓰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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