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送白璿一歸金谷(송백선일귀금곡)-덕암(德庵) 위석규(魏錫奎)(1883 ~1913)

HL3QBN 2017. 4. 17. 20:49

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25)


送白璿一歸金谷(송백선일귀금곡)

금곡으로 돌아가는  백 선일을 보내며


-덕암(德) 위석규(魏錫)(1883 ~1913)


愛君求道志高深(애군구도지고심)

사랑하는 그대 도 구하는 뜻 높고 깊으니


負笈今來及玉林(부급금래급옥림)

지금까지 책 상자 짊어지고 옥림에 미쳤네.


行李臨歸袖問(행이임귀삼수문)

나그네 돌아갈 무렵 악수하고 안부 물어


峨洋一曲誰知音(아양일곡수지음)

아양의 한 거문고 곡조 누가 그소리 아나.


注)

峨洋一曲 - 백아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종자기는 이것을 잘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훌륭하다. 험준하기가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兮若泰山]" 하였으며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 [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광대한 흐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兮若江河]" 하였다. 이를 지음(知音)이라 하여 친구 간에 서로 상대의 포부나 경륜을 알아줌을 비유한다.


魏錫奎(고종15년 1883 ~ 1913) 향년 36(옮긴이 注 저자는 1878년이라 기록했으나 장흥위씨 보첩과 여러자료를 참고하면 1883년에 출생하신 것 같습니다.) 字는 여장(汝章), 號는 덕암(德庵). 본관은 장흥(長興)이다.족형 홍의재 위봉과 안양 기산 백봉흠에게 수학했다.증조부는 위도방(魏道昉)이고 조부는 위영집(魏榮集)이다.아버지는 위윤조(魏胤祚)이며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옮긴이 注 장흥 위씨 보첩의 내용을 참고하면 4남4녀로 되어있습니다.)

어머니 친정은 용산 상금으로 수원백씨 집안인데 외할아버지는 백정수(白貞洙)이다.외가 선산은 전라도 장흥군 용산면 풍길 마을 용소등(龍沼嶝)에 있다.

1905년(광무9)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고 나아갔으나 이후 면암이 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906년(광무10) 중국으로 떠나 만주,러시아, 등지에서 朴泰文,姜明運,鞠思成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니콜라스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묘는 니콜라스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장천재 입구에 1989년 의열비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숭령이 짓고 글씨는 광주시 이돈흥이 썼다.


번역자 注)

젊은 날 중국사서 주자서물을 이해할 정도로 학문이 앞서 간 것 같다.시와 행간에는 우국탄세(憂國歎世)의 언사(言辭)가 있어 지사(志士)의 위의(威儀)가 보인다.만주 연해주 광야에 구국의 길로 나서지 않았어도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을 것 같다.삶이란 가정도 없어 헛된 망상이지만 한마디 말을 남긴다.위 열사의 용산면 상금리 외가는 필자(김규정)의 외가이기도 하다.큰 외숙 白光均이 풍길 선산을 잘 수호하고 성실하게 제사도 받든다.


옮긴이 注)

덕암공 諱 석규(錫奎)는 저자는 1878년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1883년 태어나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저자는 장흥 위씨 30세, 청계공파,아버지는 효자송의 주인공 윤조(胤祚)와 어머니 수원(水原) 백씨(白氏)의 장남으로 1883년 관산 당동(堂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라가 열강의 각축으로 매우 어지러울 때 나서 성장했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매우 강한 그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한․일 의정서체결, 을사보호조약체결로 사실상 국권을 잃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피가 끓어올랐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파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면암 최익현이 반대운동을 벌이다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했다. 이를 보고 공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불과 24세(1906년)의 청년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유서와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물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동지들과 합류했다. 운동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병을 데려오고, 식량을 조달하는 일에서부터 명망가들을 찾아가 운동에 동참을 권유하기도 했다. 몸을 혹사한 나머지 병을 얻어 고향을 떠난 지 고작 7년만인 1913년 4월 27일 이국타향 러시아 니콜라이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옥천 위욱량과 덕운 위황량등이 공의 손자이다.

(자료제공 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 위신복 연구위원)


재치(財痴) 쓰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