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天會 (호는 취수헌(醉睡軒) 1629~ ?)
早年弓劒意猶深
나이 어릴 때 활과 칼에 뜻이 깊었는데
湖海風聲動遠林
호수와 바다의 바람소리에 먼 숲이 움직이네.
退倚層欄依斗立
물러나 층계의 난간 기대고 북쪽의 별을 의지하니
誰知夜夜望京心
누가 밤마다 서울을 바라본 마음을 알리요.
※ 취수헌공의 시를 보면 관직에서 물러남이 몹시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대개 당시의 관리들은 억울하게 퇴진할 경우 다시 복직시키는 사례가 많았음으로 공도 또한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밤마다 층계의 난간에 기대어 북쪽의 별과 서울을 응시하면서 세월을 보낸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삼수군수공(諱 天會 24세, 1629~ ?) : 자(字) 여우(汝遇) 호(號)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諱 국보(國寶)와 恭人 광산金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公은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公을 보고 武科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젊은 시절 번쾌불사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호방한 용력과 멋진 한시를 창작할 정도의 지식과 뛰어난 문학성을 겸비하여, 어모장군오위도총부도사 등 여러 내직을 역임하다 1664년 함경도 변경 삼수군수(三水郡守)를 제수 받았다. 당시 삼수(三水)에는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1660년부터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있었다.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편의 제공 및 잘 보살펴 주어 이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고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酬唱)하며 보내다가 1669년 종(終)하였다고 수록하였다. (장흥위씨 대동보 지장록 p132)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66년 윤선도의 이배(移配)시 편의 제공으로 용천부에 정배(定配) 되기도 하였으나, 1671년에 경상우도병마우후를 제수 받아 1672년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의 죄목으로 1683년까지 도형(徒刑), 정배(定配), 이배(移配) 등 형벌 집행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어 정확한 종년(終年)은 알 수 없다. 배(配)는 淑夫人 죽산安氏, 淑夫人 연안李氏이며, 묘소는 행원 江亭中麓乙座이고 1822년 석천사(石川祠)에 배향(配享)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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