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초에 장흥군 안양면에 귀촌하여 살고 있는 위인규종친(32세 행원문중 첨정공파)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안양면소재지 근처에서 연세가 있으신 여성종친을 만났는데 집에 장흥위씨족보가 있는데 어떤것인지 봐달라고는 부탁이었다...

황급히 일정을 잡고 7월10일 방문하여 족보와 몇가지 문서들을 살펴봤는데... 족보는 총14권으로 1916년 병진보였다...그런데 특이 한 문서(책,사진 맨위)가 보여서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와서 살펴보니 참 중요한 문서(책)로 보였다.
흥미로운점은 '장흥위씨대동문안서(長興魏氏大同文案序)이다.
族而譜焉門而案焉ㅇ之詳略唯ㅇ不同事之(종이가 접혀있음)
梗既實無不同一是出於追遠睦族地道也
則譜若具焉案關亦也而吾東士大夫
家率皆且譜且案者是曷故焉盖譜則記載
詳故卷帙重大繙閲浩煩考覽不便案
則記載略故卷帙簡系繙閲容易考覽甚
便此案之所以不可關者也然則有譜
尙爾有案况忕?未譜之門乎吾魏之居東方
者長興一貫之外更無別貫則姓魏者
장흥위씨 대동문안 서문 족속(宗族)에는 족보(譜)가 있고, 각 가문(門)에는 문안(案)이 있다. 그 상세함과 간략함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 취지는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한결같이 조상을 추모하고 먼 선조를 잊지 않으며(追遠), 종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족보가 이미 갖추어져 있더라도 문안(文案) 또한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대부 가문들이 대개 족보와 문안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체로 족보는 기록이 매우 상세하므로 책의 분량이 방대하여 펼쳐 보고 찾아보기가 번거롭고 불편하다. 반면 문안은 기록이 간략하므로 책의 분량이 간단하고 요약되어 있어 펴보고 살펴보기가 쉬우며 참고하기가 매우 편리하다. 이것이 바로 문안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미 족보를 갖춘 집안도 오히려 문안을 두고 있는데, 하물며 아직 족보를 편찬하지 못한 집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우리 위씨가 동방(東方, 조선)에 거주하는 경우를 보면, 장흥(長興)이라는 한 본관 외에는 다른 본관이 없으니, 곧 성이 위(魏)인 사람은 모두가 ...

外五六百年參商面目同在於一卷中開卷
之日將朝暮相遇矣指點其枝葉歷痒?其
本根則均是同根一氣之地追遠睦族之思
必倍誰昔油然隨発矣因是擴充課忠
責孝母泰世德明倫敦睦勿失宗誼則吾
門昌大必有其日矣果爾則豈非忕案之力
乎終始戶役者禧良其良
丁卯秋七月望
聽溪公十代孫 啓泮 謹書
비록 서로 오륙백 년의 세월이 떨어져 있고, 마치 하늘의 삼성과 상성(參商)처럼 만나지 못하였더라도, 이제는 모두 한 권의 책 속에 함께 있게 되었으니, 책을 펼치는 날이면 마치 아침저녁으로 서로 마주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가지와 잎, 곧 각 파계를 가리키며 살펴보고, 그 뿌리와 근본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모두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기운의 자손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조상을 추모하고 종족의 화목을 도모하려는 마음은 반드시 예전보다 몇 배나 더해져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이로써 더욱 마음을 넓혀 충성을 권하고 효도를 독려하며, 선대의 덕을 욕되게 하지 않고, 인륜을 밝히며 화목을 돈독히 하고, 종족 간의 의리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 문중이 번창하고 크게 발전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참으로 그렇게 된다면, 어찌 이것이 바로 이 문안(文案)의 힘이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맡아 수고한 이는 희량(禧良)과 기량(其良)이었다.
정묘년(丁卯) 가을 7월 보름날, 청계공(聽溪公)의 10대손 계반(啓泮)이 삼가 쓰다.

우선 족보 관련문서로 보였는데 공동도유사에 춘헌 위계반(31세 장천문중 청계공파), 운수 위계충(31세 행원문중 괴봉공파)로 기록되어 있다.
任員錄
都有司 幼學 魏啓泮 古邑(도유사 유학 위계반 고읍)
別軍職: 魏啓忠 杏園(별군직 위계충 행원)
別有司 正言 魏鍾謙 咸興(별유사 정언 위종겸 함흥)
幼學 魏相 會寧(유학 위상 회녕)
校正 幼學 魏啓文 古邑(교정 유학 위계문 고읍)
魏啓龍 同(위계룡 고읍)
魏日煥 杏園(위일환 행원)
掌財 魏啓勳 基洞(장재 위계훈 기동)
魏璟奎 丹山(위경규 단산)

長興魏氏大同文案(장흥위씨대동문안)
凡例(범례)
-. 惟我南北之宗惟我南北之宗累有合譜之論而未克者誠一欠事故詢議敦親睦事/ 우리 남종과 북종은 여러 차례 합보를 논의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하나의 아쉬운 일이었다. 이에 종친들과 상의하여 친족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종족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 南宗入單或有後先故派系不失次序編輯則間有分編空行北案一時入單故連編登榟懸頭註以明派系事/
남종은 입단 시기에 선후가 있더라도 파계의 차례를 잃지 않도록 편집하였으며, 필요한 곳에는 빈 줄을 두어 구분하였다. 북안은 같은 시기에 입단하였으므로 연이어 편집하였다. 또한 머리글 주석을 달아 파계를 분명하게 하였다.
-.南宗以齒為(矛=>序)間寓微意北案依單入例事/ 남종은 연장자 순으로 배열하되 편집상 약간의 뜻을 담았고, 북안은 입단한 순서에 따라 수록하였다.
-.官爵以實職填書名下事/ 관직과 작위는 실제 역임한 직책을 이름 아래에 기록하였다.
-. 或有同名故書父名及居地而別之事/동명이인이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거주지를 적어 서로 구별하였다.

昭和二年九月五日印刷
昭和二年九月三十日發行
長興魏氏大同門案
定価二円
朝鮮總督府許可
複製不許
全羅南道 長興郡 府東面 杏園里二百九番地
著作兼 發行者 魏啓忠
全羅南道 長興郡 府東面 杏園里二百六番地
印刷者 魏禧良
全羅南道 長興郡 府東面 杏園里二百一番地
印刷所 石川齋
全羅南道 長興郡 長東面 霞山里 二百二十七番地
發行所 霞山齋
《장흥위씨대동문안(長興魏氏大同門案)》
소화 2년(1927년) 9월 5일 인쇄 소화 2년(1927년) 9월 30일 발행 정가 2원
조선총독부 허가 복제는 허용하지 않음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행원리 209번지 저작 겸 발행자 : 위계충(魏啓忠)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행원리 206번지 인쇄자 : 위희량(魏禧良)
전라남도 장흥군 부동면 행원리 201번지 인쇄소 : 석천재(石川齋)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227번지 발행소 : 하산재(霞山齋)

昭和五年拾月拾參日完結
全南 光州郡 孝泉面 碧桃里 三三七番地
寫人 魏尙良
一名 尙彦
隆
소화 5년(1930년) 10월 13일 완결
전남 광주군 효천면 벽도리 337번지
사인(寫人, 필사자) : 위상량(魏尙良) 일명(一名) : 상언(尙彦), 융(隆)

2010년 발간했던 원산 위정철 저(著), 장흥위씨 보의론총(長興魏氏 譜疑論叢)」의 내용중에 남북합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1927년에 시도된 남북합보에는 관북에서 547세대가 참여한 초안까지 인쇄했다. 그러나 관북종중은 당시에 족보발행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때 남북 종친이 서울에서 합보를 위한 만남이 이루어졌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남종이 관북 종설ㆍ진환ㆍ재필ㆍ재학ㆍ재학ㆍ재린 등이 방문했을 때 합보를 제의해 초안과 서문을 춘헌공과 대원공의 이름으로 써두고도 내지 못한다. 그 때가 1927년(丁卯)이다. 당시 남북의 합보를 위해 수단을 정리한 서류가 하산재에 보관돼 있다. 두 번의 합보시도가 누구인가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자 관북종중은 13년 후인 1940년 경진보(庚辰譜)를 단독으로 발행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일 정묘보가 발행됐다고 가정해 보자. 관북종친들은 전후 7번 족보를 발행했으나 전쟁을 피해 남하하면서 족보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1689년의 기사보(己巳譜)와 해방직전인 1940년에 발행한 경진보(庚辰譜)이다. 이들 족보만 있다면 관북 위씨의 연원 등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면서 선조들의 글을 한편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정묘보 발행의 불발은 너무 아쉽다. 정묘보가 간행됐다면 그동안 관북보에 실었던 중요한 사적이 고스란히 전재됐을 것이다. 자공 할아버지께서 세종 때 손자와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개척했던 사연까지는 몰라도 그쪽의 중요한 기록이 망라됐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1927년 당시 관북 위씨의 분포상황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발목을 잡은 결과가 이렇게 문중의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것이다.
원산 위정철대부님에게 사진을 보내고 연락을 하였더니 남북합보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건으로 보이니 황급히 수거하여 보관하거나 사진이라도 찍어서 자료를 확보하라는 말씀이 계셨다...
장흥에 몇번 다녀갔지만 바쁘거나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가 되질 않아서 아직 찾아 뵙질 못했다. 또한 회주사에 보관중이라는 당시의 자료들이 있는지도 시급히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 또한 확보한 자료를 더 자세히 살핀다면 당시의 상황을 지금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것으로 예상한다...
혹시라도 이와 관련된 자료나 또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거나 전해들은 이야기라도 있으신 종친들은 주저말고 제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자료 번역 및 해설 자문 : 야운 위이환
장흥위씨도문회 부회장 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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