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석천사 창건 관련 문서

HL3QBN 2026. 4. 21. 21:24

석천사 창건 관련 문서

석천서원 배향(配享) 청원문(請願文)

 

본 문서는 석천서원에 걸려 있는 배향 청원문으로, 위대용·위대기·위산보·위정보·위천회·위천상 등 여섯 인물을 배향하고자 향중 유림의 50여명이 연명하여 성주에게 올린 집단 청원문이다.

좌측 상단에는 성주의 수결이 있으며, 좌측 하단의 흘린 글씨는 청원문에 대한 성주의 감상평으로 보인다. 청원문인 만큼 필서에도 각별한 정성이 담겨 있다. 아쉽지만 종이 일부가 훼손되어 탈자가 있다.

鄕中多士 邉最源 文思吉白璜等謹齋沐上書于 / 고을에 여러 선비 중에 변최원, 문사길, 백황 등이 삼가 목욕재계 하고 글을 올립니다.

城主閤下伏以先賢之勳烈宣享俎豆而特蒙公庇之饋則此是官家之盛典也 賢院之腏享差有先後ㅇ漏/ 성주께 삼가 아뢰옵니다.
선현들의 공훈은 이미 제향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며, 더욱이 공의 보살핌과 은혜까지 입었으니 이는 관가의 큰 예전입니다.
다만 서원에서의 배향에는 선후의 차이가 있어 혹 누락된 바가 있습니다

官給之制則此是士論之繼發也/ 관에서 베푸는 이 제도는, 곧 사림의 공론이 이어져 발현된 것입니다.

噫壬亂以後本鄕祠宇何門無之而至於魏氏一門則世襲忠孝代有勳業可謂冠冕于鄕
吾鄕/아, 임진왜란 이후 우리 고을에 사우(祠宇)가 어느 문중인들 없겠는가마는, 위씨 일문에 이르러서는 곧 대대로 충효를 이어받고 세대마다 공훈이 있어, 가히 고을에서 으뜸이라 이를 만합니다.

而本院卽所石川祠者也主從合爲六位而其一則以壬亂道募粟都有司/ 그리고 이 서원은 곧 석천사(石川祠) 입니다. 주향과 종향을 합하여 모두 여섯 분이 모셔져 있으며, 그 가운데 한 분은 임진왜란 때 도내에서 군량을 모집하던 도유사였습니다.

朝家ㅇ以漢之ㅇㅇㅇㅇ
則魁峯ㅇㅇ則大用也 其二則以參議公之從弟壬亂爲李忠武戰艦先鋒將唐浦露梁之戰擊破倭船無慮數百艘而/ 조정에서 혹 이를 어렵게 여긴다 하더라도, 괴봉 휘 *대용은 쓸 만한 인재이니 마땅히 크게 기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참의공의 *종제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의 선봉장이 되어
당포와 노량의 전투에서 왜선 수백 척을 격파하였으니…

朝家以其功特 除忠淸水使 當時 所稱紅面飛將軍而諱則大器也 第三則以參議公之孫當丙亂ㅇㅇ扈從近臣南漢風雪躬負/ 조정에서 그 공으로 특별히 충청수사에 임명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홍면비장군’이라 불렀으며, 그의 이름은 휘 *대기이다. 셋째로, 참의공의 *손자가 병자호란 때 근신으로서 임금을 호종하며 남한산성의 눈보라 속에서 몸소 짊어지고(모시고)~

玉ㅇ江~~ 賜刀而標信宣傳徃來淸陳喝脤龍馬不忝 君命亂已未及大施而以文化縣令終馬其諱則山寶而已上位則ㅇ時倂享而乃(於)/ 옥○강 전투 등에서 칼을 하사받고 신표를 지니며 명을 전달하고 왕래하며, 진영을 정비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뛰어난 인재로서 군명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난이 이미 끝나 크게 재능을 펼칠 기회는 없었으나 문화현령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이름은 휘 *산보입니다. 윗자리에 계신 분들과 함께 한때 배향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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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等城主時卽蒙
官品更不必架疊而藍浦縣監諱廷寶以文化公之弟甲亂爲都元帥張公 晩佐幕規畫方略多 ㅇ(軒)ㅇ且(與)金兵使孝信同禦康賊之亂(再)尊宗社以是錄振武一等勳三水府使諱天會以參議公之曾孫孝廟朝登武科申大將汝喆卽剡/ 성주에게 저희들이 아뢰기를 재임하신 때 이미 은혜를 입었고, 그 공은 관직을 거듭 더할 필요도 없을 만큼 충분합니다. 남포현감 휘 *정보는 문화공의 아우로서
갑자난(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을 보좌하여 군막에서 전략을 많이 세웠고 김병사 효신과 함께 왜적을 막아 나라를 다시 보전하였으며 이로 인해 진무 1등 공신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삼수부사 *천회는 참의공의 증손으로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신여철 장군으로 천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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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薦云以(契)噌復生張飛不死歷ㅇ何ㅇ卽 ㅇ宣傳官兼司僕寺乘
上甞試其勇 賜表裏一襲毎朝執(手)稱賞汝國家ㅇ(石?)及孝廟昇遐公北望痛哭累日不食幾絶而復甦顕廟初閔相公鼎重以忠孝薦于朝此則俱戰於湖南卽義錄及老峰先生/ 장차 천거하며 말하기를, 마치 장비가 다시 살아난 듯하니, 여러 번 시험해 보아도 그 용맹이 어떠한가 하면, 곧 선전관 겸 사복시 승이 되었고, 임금께서 그의 용맹을 시험하시고 옷 한 벌을 하사하시며 매양 손을 잡고 칭찬하시기를, ‘너는 나라의 방패와 같은 존재다’라고 하셨습니다. 효종이 승하하자 공은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여러 날 음식을 끊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났고, 현종 초에 민정중이 그 충효를 들어 조정에 천거하였습니다. 이 인물 역시 호남에서 함께 싸운 공이 있어 의록(공신록)과 노봉선생의 기록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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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集中海南縣監諱天相以三水公之弟在家則爲孝友之人居官則爲淸白之吏以其孝行則道薦題目春曺之首以其治蹟則ㅇ民赴役號海南之墻此其略擧梗(槩)而不敢煩凟於
淸覽也右三位齊配卽差後而曾於前等城主時/ 문집에 실린 해남현감 휘 *천상은 삼수공의 아우로서 집에 있을 때는 효성과 우애를 갖춘 사람이었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청렴한 관리였으며 그 효행으로 도에서 천거되어 예조 추천의 으뜸이 되었고 치적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앞다투어 따르며 그를 ‘해남의 성벽’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그 대략을 든 것일 뿐, 감히 자세히 아뢰어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위의 세 분은 함께 배향되었고, 시기는 다소 뒤였으나 이전 성주 때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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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等以習性緩懶之致其於本院ㅇ無尊仰之心矣
前等城主亦不爲優待賢院之盛意而挨過一等乃 ㅇ溷者莫ㅇ民等 不敏之責也魏門祖若孫之卓蹟偉行炳烺前後而幷未蒙 官給之享則春秋享祀之際以士林言之則不無向隅之歎/저희 백성들은 본래 성품이 해이하고 게으른 탓으로 이 서원에 대해 아직도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하였습니다. 전임 성주 또한 서원을 우대하려는 뜻이 없었고 그저 세월만 흘려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모두 저희의 불민한 탓입니다. 위씨 문중 여러 후손들의 뛰어난 행적은 전후로 빛나건만 모두 아직 관에서 제향을 받지 못하였으니 봄가을 제사를 지낼 때마다 사림의 입장에서는 한쪽에 치우쳐 있는 듯한 탄식이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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矣狙俎豆陳設之時精靈言之則可無同盃之淚乎人情神理俱爲未安而我 閤下尊賢尙德之意出尋常內之而士林之感誦至今不絶于 口而本祠三位之進後爲請者亦出于此而民等 不揆椳越敢此齊籲伏願
細之垂ㅇ後以進?配三位許給

祭物之意特爲題下一以ㅇ官家之盛典一以副士林之顒望千萬祈息之至/ 제사를 차려 올릴 때마다 영령의 입장에서 말하면, 함께 잔을 나누지 못하는 한이 어찌 없겠습니까. 사람의 정과 신명의 이치 모두 편안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각하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뜻이 남다르시니 사림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본 사당의 세 분을 뒤에 배향해 달라는 청도 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희는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함께 호소하오니, 굽어 살펴 받아주시어 세 분을 추가로 배향하고 제물을 하사하도록 허락해 주시며 특별히 결재를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관가의 성대한 예를 빛내는 일이 되고 또한 사림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천만번 간절히 기원합니다.

城主 藻鑑/ 성주께서 혜안으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己丑八月初六日/기축년 8월 초6일

鄕中多士 邉最源 외 等 총47명/향중의 여러 선비들, 변최원 등

◇성주 필적과 수결로 보임
此是尊賢之盛事/ 이는 현인을 높이는 성대한 일이다.
ㅇㅇ樂ㅇ而ㅇㅇ/
恨招來之晩ㅇ/ 다만 (이 일을) 더 일찍 불러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아래는 병오년에 장흥부사(長興府使)가 고오진(高五鎭, 4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安良面內岐山戶籍單子
第五統第五戶幼學高五鎭年四十己亥本長澤
父通德郞 時顯
祖通訓大夫行鎭海縣監金海鎭管兵馬僉節制都尉 碩謙
曾祖▣▣(學生) ▣▣(萬擧)
外祖學生金德文本富寧
妻柳氏齡三十三丙午籍瑞山
父幼學 東箕
祖學生 匡臣
曾祖學生 輝德
外祖學生朴敏漢本密陽
賤口秩奴有萬年三十八辛丑婢介德年三▣(十)
三丙午一所生婢占禮年八辛未二所生奴▣
老未年四乙亥丙子戶口相準印
[印] [周挾字改印]
行府使 [署押]

 

1818년(순조 18)에 장흥군(長興郡)에서 안량면(安良面) 내기산(內岐山) 제5통 제5호의 유학(幼學) 고오진(高五鎭)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이다. 호주(戶主)인 고오진은 나이가 40세로 기해년(己亥年)에 태어났고, 본관은 장택(長澤)이다. 고오진이 태어난 기해년은 1779년(정조 3)이므로 이 문서의 작성 연도는 1818년으로 추정하였다. 이어서 고오진의 사조(四祖)가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는 고시현(高時顯), 조부는 고석겸(高碩謙), 증조부는 고만거(高萬擧)이고, 외조부는 본관이 부령(扶寧)인 김덕문(金德文)이다. 가족 구성원으로는 아내 서산류씨(瑞山柳氏) 1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33세로 병오년(1786)생이다. 아내의 사조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류동기(柳東箕), 조부는 류광신(柳匡臣), 증조부는 류휘덕(柳輝德)이고, 외조부는 본관이 밀양(密陽)인 박민한(朴敏漢)이다. 그리고 노비 4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자종이 2명이고, 여자종이 2명이다.
고오진(1779~1850.2.21.)의 본관은 장흥이고, 자는 이서(彛叙)이다. 첫 번째 부인은 영광정씨(靈光丁氏)로 정시혁(丁時爀)의 딸인데, 자식은 없다. 두 번째 부인은 서산류씨(瑞山柳氏)로 류동기의 딸이다. 아들은 고제호(高濟浩), 고제의(高濟義), 고제순(高濟洵), 고제희(高濟羲)가 있고, 딸은 이한규(李翰奎)와 김정현(金正鉉)에게 시집갔다.
안량면 내기산은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