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陪淵齋先生遊天冠山次長川齋韻(배연재선생유천관산차장천재운)-눌와(訥窩) 윤자현(尹滋鉉)(1844~1909)

HL3QBN 2017. 8. 26. 20:54

장령시문(長寧詩文, 저자 김규정) 위문관련 시문(41)


淵齋先生遊天冠山長川齋韻(배연재선생유천관산차장천재운)

연재 송병선 선생을 모시고 천관산에 유람 갔다가 장천재 시에 차운하다.


-눌와(訥窩) 윤자현(尹滋鉉)(1844~1909)


魏氏平泉業(위씨평천업)

장흥 위씨 평천 별장


傳來築一樓(전래축일루)

누각 하나 세워 전한다.


澗石閒中趣(간석한중취)

산골 돌에 한가한 취미 얻고


琴書象外遊(금서상외)

금서로 바깥 나들이 견주네.


此地思存老(차지사존노)

여기서 어른 공경 생각하니


於山間子由(어산간자)

산에서  그대 때문에 묻는다네.


名家淸福厚(명가청복후)

명가 깨끗한 복 두터우니


與俗肯同流(여속긍동류)

세속과 어찌 함께 흐르랴.


*.宋秉璿(헌종2년 1836 ~1905) 향년 70

字는 화옥(華玉), 號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본관은 은진(恩). 충남 회덕에서 태어났다.

송시열의 9세손,송병순(宋秉珣)의 兄이다.

1905년 음역 12월 30일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유서를 남겨놓고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했다.

우암 송시열의 노론 적통을 잇는 정통주의 성리학으로 독자적인 연재학파를 창설했다.

장흥 고을에도 여러 제자를 두었고 관련유문이 수 편 전한다.

연재의 천관산행은 수 많은 제자들이 배종해 그 당시 사건이었고 사태였다.


연재선생이 지은 遊月出山天冠山記는 1898년 윤 3월 6일에서 16일까지 월출산을 거쳐 천관산을 탐방하면서 남긴 글이다. 삼종제 위옥 송병완, 명중 채봉서, 치장 안성환, 자상 박기진, 윤범 김재홍, 성재 김시중, 향원 여조연, 공범 오석렬, 내옥 이경순, 익중 송홍 등과 동행하였다. 경문 김한목, 안준식 등이 합류하였고 영산진을 지나 영암 대월루, 도갑사, 구정봉을 올랐다가 상견성암에서 잠을 잔 뒤 구림, 만덕산 백련사, 구강포를 지나 장천재를 거쳐 천관산에 오른 일정을 서술하고 있다.동행한 위문인사는 위계반, 위혁기,위계룡,위계온,위계문,위계학,위계관,위병량,위성규등이며 금수굴을 지나 다시 장천재로 내려왔고 여기정을 지난 다음 부춘정, 보성의 목미암, 모후산의 초연정, 곡성의 문성공(안향)유상을 배알하고 귀가한 일정이다.

 

*.사존노(思存老)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일찍이 환공(桓公)을 수행하여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했는데 봄에 길을 떠났다가 겨울에 오면서 길을 잃었다. 이에 관중이 "늑은 말의 지혜를 쓸만하다.<老馬之智可用也>" 하고 늙은 말을 풀어 놓아 그 뒤를 따라가다가 마침내 길을 찾게 되었다.<<韓非子 說林>> 늙어 쓸모없어 보이는 말도 다 소용이 있다.


*.어산간자(於山間子由) - 이런 해석을 달아도 될 듯하다. 산에서 소 자유를 찾았네. 유람의 유익함에 대해서는 송나라 蘇子由 蘇轍의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것도 평소에 글을 읽고 학문을 하여 마음속에 쌓인 것이 풍부해진 뒤에 외물을 보고 듣는 것이 내면을 감동시켜 발현시킬수 있다. 마음속은 공허하여 아무것도 없으면서 오로지 외물의 도움에만 의존할 수 있겠는가.


*.윤자현(1844~1909) 향년 66

字는 형삼(亨三),號는 눌와(訥窩), 坡平尹氏이다.父는 尹榮鎭,母는 安東權氏 權成綠의 女.

화순군 능주면 월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3세에 조부로부터 육갑과 천자문 등을 배웠는데, 모두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20세에 윤자덕(尹滋悳)을 알현하는 것을 필두로 39세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47세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48세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적인 논의를 계속 이어나간다. 그들은 구한말 항일정신을 북돋은 화서학파 들이었다.연재 송병선의 高第이다.


재치(財痴) 쓰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