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남편 목을 자른 위씨부인 이야기...

HL3QBN 2016. 3. 10. 20:56

일만 의병이 묻었다는 전남 해남군 옥천면 성산 만의총...

앉아 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대문 밖까지 나갔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길 몇 번이나 했는지…. 발에 감각도 없습니다. 남편(호산공 윤동철)은 세상과 담을 쌓고 글만 읽은 서생이었습니다.

집안의 궁핍함은 날이 갈수록 더했고 궁핍을 해결해야 할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러한 남편이 집을 나갔습니다. 왜군이 동네에까지 밀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책을 내팽개친 채 집을 나선 것입니다

요 며칠 동네가 시끌벅적하다는 사실을 새댁인 나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모였다하면 온통 전쟁 이야기뿐 옥천 성산 뒷산인 병마산에서 의병들이 모여 전투연습을 하는 것도 곧장 눈에 띄었습니다

한 달여 전인 9월 16일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크게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기뻐했는데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는가 봅니다

왜군 부대가 곧 해남에 올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나돈 얼마 후 정말로 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왜군이 옥천 성산(현재는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방향으로 밀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남편은 집을 나섰지요. 무기도 없고 싸움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남편이 무슨 용기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하는지

모든 조선인들이 일어나 싸우는데 본인도 당연히 싸워야 한다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충이라며, 집에 있던 농기구를 들고 나선 것입니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선 남편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병치재(강진군 도암면과 해남군 옥천면 사이의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도 아예 없습니다

오늘 새벽 병치재를 가득 메웠던 하얀색의 인파와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남편을 떠나보내며 나도 그 물결을 봤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끝없는 물결들이 병치재를 넘어 옥천 성산으로 향했습니다. 두건을 쓴 아낙네들의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습니다. 전쟁터로 떠나는 식구들을 망연히 지켜볼 뿐 소리내어 흐느끼는 아낙들은 없었습니다

그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 우리에게 흐르는 감정은 동일했을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 것이라는 것,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할 땅이라는 것,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말리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침이 가고 낮이 지나고 새벽이 왔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전쟁이 일어난 옥천 성산들녘으로 향합니다. 달빛에 의지하며 길을 걷습니다. 적막을 헤치며 다가간 성산뜰, 뿌연 달빛 속에 비친 들녘이 온통 하얀색입니다. 10월의 들녘이 이렇게 하얗다니.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하얀색을 봤을 뿐인데 가슴이 방망이질 칩니다. 하얀 옷을 입은 시신들. 전 세계 유일하게 전 백성이 하얀색만 입는 조선인들.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들녘의 색이었지요

그렇게 조선 의병들은 죽어있었습니다. 그 숱한 죽음 앞에서 무서움이란 현실을 직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신들린 사람마냥 시신들을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딘가에 있을 남편을 찾기 위해

그 많은 시간동안, 얼마나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는지. 먼동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한 시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이 떨리고 몸이 떨려왔습니다. 집으로 데려 가야합니다. 이 추운 들판에서 종일 있었을 남편, 싸늘한 추위가 몰려오는 10월 10일 밤을 남편은 종일 이렇게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평소 뼈만 앙상했던 남편, 그러나 그 시신을 옮기려 하니 감당이 안 됩니다. 남편의 혼만이라도 챙기기로 했습니다. 주변에 버려진 칼을 들어 남편의 목을 벱니다

숨을 삼키고 울음을 삼키고 남편의 소중한 머리를 치마로 감싸 안고 집으로 향합니다. 죽은 시신의 목을 베고 코를 베는 일본군으로부터 남편의 온전한 목을 지켰다는 안도감을 안고서 말입니다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에서 강진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병치재에서 베를 짰던 위씨 부인 이야기 입니다.



해남 옥천면 만의총 고분에서 서수형토기를 비롯 11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된 사실은 2009년 공중파 방송은 물론 중앙일간지에 대서특필됐습니다.
 이정호 동신대 교수는 만의총 고분은 5-6세기 초반 백제, 신라, 가야, 일본 등 4개국 유물이 함께 발굴된 점과 경주지방에서만 발굴된 신라 고유의 토우와 결합된 서수형 토기가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처음 발굴된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또 이 교수는  이 무덤이 해남윤씨 족보에 야사로 전해지는 정유재란 당시 의병의 집단 매장지일 가능성도 언급했습니다.
 정유재란 때 강진군 도암면 병치에서 윤신과 그의 조카 윤치경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1597년 전사하자 윤신의 부인 해주오씨와 윤치경의 부인 여산 송씨가 피난처를 찾아 1606년 화방마을로 이주했습니다.

 해남윤씨가에서는 1926년도 발행(2008년 8월 한글판으로 번역 재발행)한 화암사지를 통해 옥천면 성산리 전투에서 해남윤씨 일곱 사람이 함께 순절한 사연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암사지에 따르면 윤윤, 윤신(윤윤의 제), 윤동철(윤신의 자), 윤치경(윤윤의 장질), 그리고 윤이경, 윤익경(윤이경의 제), 윤동호(윤익경의 자) 등 일곱 선조가 국가 안위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해남윤씨 칠충 선양회는 강진군 군동면 화방리에 화암사를 짓고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암사지에는 윤동철의 처 위씨 부인에 대한 기록도 남기고 있습니다. 위씨 부인은 결혼한 지 수개월 만에 남편과 시부모 형제 등 네 명을 잃게 됩니다. 위씨 부인은 전장 터에서 시신 4구를 찾아오는데 여자의 몸이라 두발만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는 세계 어느 전쟁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재치...

사진은 오늘 해남출장길에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