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와의 대담...원고 작성중
元老와의 對談
광주에서 장흥과 서울을 넘나들며 문중일에 솔선한
南田 禎佑 광주종친회 前會長의 30년 歷程
#. 대부님 안녕하십니까? “원로와의 대담”을 취재하고자 왔습니다. 南田傳記를 읽고 감명깊었습니다.
내가 무슨 원로야 과분하네 南田傳記도 80을 넘기면서 삶의 흔적을 내 자녀들 한테나 남기려고 만들었지 외부엔 몇권 나가지 않았어요.
#. 궁금한 내용이 참 많은데 차례차례 여쭈어 보겠습니다. 종친회 모임에는 언제부터 참여하셨는지요?
어려서 시제, 가계, 문회등에 아버지 따라 다녔으니 일찍 싻이 텄다고 봐야죠. 1984년 직장따라 광주로 이사 오면서 광주종친회에 책임을 맡았지요. 광주종친회 재무,총무,부회장등을 연임하다 2002년 광주종친회 회장을 맡았어요. 총무 3대를 연임하면서 참여율을 높이려고 노력했지요. 한 때는 120여명이 참석하여 총회와 체육행사등을 겯드리며 즐겼던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옥과향교앞 존재현감 거사비(가운데)
#. 광주종친회 회장 재임시에 存齋 縣監 去思碑 건립을 주도하셨는데 거사비란 말이 생소합니다. 어떤 뜻이 있습니까?
가신이를 기린다는 뜻이죠. 원로 유림 東江 柳漢相선생의 자문을 받아 정했어요. 儒道會 전남 사무국장 재직시라 옥과 유림들과는 친숙했어요. 추진위원회는 옥과 유림(대표 오용근 전교)으로 구성하고 소요경비는 전국의 종친과 관련문중의 성금으로 충당했어요. 건설업자 위양근 사장이 전담하겠다는 성의를 사양했지요. 역대 현감의 추모비가 옥과면사무소에 40여기 있고 향교앞에는 5기가 서 있었는데 그 중앙을 차지했으니 명당자리죠. 155명의 역대 현감중 3대 河西 현감(김인후)과 107대 存齋縣監 이 어진 현감이라고 구전되어 옵니다. 詠歸書院에서는 두분 현감을 배향 추모합니다.
#. 광주종친회는 그시절 종보도 발행하셨는데 그 때 상황은 어떠셨습니까?
광주종친회가 1980년 창립되었으니 오랜 바램이었지요. 창간호와 2호를 연이어 발간했어요. 그것은 두 분 부회장 圓山(정철 前씨족문화연구소장) 과 翠山(무량 前삼서고등학교장)이 글 쓴 사람들이니 가능했고 그 분들이 했지요.
#. 바라던 일들을 하셨네요. 다음에는 도문회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요.
門契長 시절을 제쳐두고 2006년 都門會로 개편될 때 회칙 초안부터 기초를 다졌지요. 상임위원과 운영위원을 연임하며 오늘에 이르렀지요. 기억에 남은 활동은 2010년 보의론 연구위원회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위원장에 雲河(증 前광주·전남 언론인협회장), 간사에 南田, 상임위원에 圓山, 위원은 종파와 지역을 감안한 1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편의상 5인의 실무소위를 두었지요.
우리 족보가 창간된 이래 많은 보의론이 제기되었으나 문중차원에서 합법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위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착수했습니다. 특히 위원장의 치밀한 계획과 상임위원의 꼼꼼한 전거 발굴이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봐요. 8개월간 4차례 본회의와 23차례 실무소위를 거치면서 6개항 13개 세항에 대한 연구결과를 매듭지었고 총회의 승인을 받아 40일간 공고 과정을 거쳐서 확정 지었어요. 연구결과에 의하여 시조공 사적비문을 補正하고 국역으로 改書했지요. 그후 일부 종인들이 世系條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어 문중 화합 차원에서 이를 번복하면서 그 경위와 진상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후세의 몫이 될 것 입니다.
장흥위씨 보의론 심의 장면
#. 우리 문중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하셨습니다. 회주사 笏記를 바꾸고 우리 종훈을 제정하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과 의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전해져 오는 회주사 笏記가 너무 지루하고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이를 간소화 하면서 번역을 곁드렸더니 모두가 좋아하더군요. 또한 2011년 대종회 회의시 宗訓을 제정하자는 의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즉석에서 이 사안은 도문회에서 제정되어야 한다며 개의안을 발의하여 유보되었지요. 그 해 12월 도문회 운영위에서 祖上崇拜, 宗親和睦, 後孫繁榮으로 제정하고 이듬해 총회에 보고하여 확정되었습니다.
#. 2018년 충렬공 신도비를 세울 때 추진위원이셨는데 신도비 건립 과정을 알려주시면 전국의 종친 및 후세에게 많은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德雲(황량 前도문회장)께서 충렬공 신도비를 근수 헌성하겠다고 제의함에 이를 수용하면서 도문회장을 위원장으로 6인의 위원을 두어 사업을 추진했지요. 비의 규모, 비문 내용 및 표기 방법, 세우는 위치등 주요 사안은 운영위원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撰은 대종회의 협조를 받아 厚谷(형윤 안양대명예교수)교수의 주선으로 고려대학교 17대 총장 李基秀 박사에게 의뢰했습니다. 비문은 후손이 제시하는 관련자료에 의하여 작성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지요. 圓山이 많은 자료를 발췌하여 雲河형과 함께 시간을 두고 꼼꼼히 다듬었습니다. 비문 내용은 역사기록을 인용했기에 객관성이 뚜렸합니다. 시공은 동광석재에 맡기면서 德雲의 말씀따라 “돈은 생각말고 “천년이 간다는 金石文字造形物답게 제작되도록 정성을 다했습니다. 후손 모두가 뜻을 모아 謹竪하였으니 선조의 혁혁한 행적 영원히 빛날 것 입니다.
충렬공 신도비
#.문중의 숙원사업을 이루는데 정성을 다하셨군요. 다음에는 대종회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요.
대종회가 출범할 때부터 참여했지요. 장학회 이사 12년,, 松潭(자형 대종회장)회장 따라 부회장 6년 역임했어요. 장흥위씨 요람 발간을 위한 편집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그 간사를 맡았어요. 중의를 모우며 좋은 책이 만들어 지도록 노력했어요. 출간후 사업을 마무리 할 때 노고에 대한 응분의 보답이 미약했어요. 도문회와 장천문중에 지원을 요청하여 보충했습니다. 2년뒤 천년세고선집 발간시에는 원고 수집과 번역을 주선했고 종료후 또 다시 두 문중의 지원을 받아 부족 예산을 메꾸었습니다. 요람과 세고선집 발간은 종친들의 눈을 뜨게했어요.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시어 여린 백성들을 생각했다는것과 괘를 같이한다고 비유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도문회에서 대종회 사무실 구입비 1억원 지원도 대부님이 앞장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당시 서울 어느 뒷골목에 초라하게 있던 대종회 사무실을 보고 꽤나 마음이 착찹했었습니다.
당위성을 주장했지요. 첫째는 위씨의 공동재산이요. 둘째는 대종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 도문회의 일이며, 셋째는 족보 만들고 남은 3억원의 주인이 우리 종원 모두라고 하면서 그 일부를 우리 사무실 구입비에 지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힘주어 말했더니 공감대가 형성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지요. 따라서 대종회는 빚을 벗었고 도문회는 뿌리 역할을 했다싶어 후련했지요.
#.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하셨는데 공직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늦은 나이에 공채를 통해서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되었어요. 장흥에서 14년간 교육청과 중,고교에서 근무하다 광주로 옮겨 13년 근속후 정년퇴임 했어요. 퇴임후에도 광주시교육청 인사위원 4년, 세종고 관선이사 4년 역임했으니 큰대접 받았다고 생각해요. 공무원 생활로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렸고 퇴임후에도 그 끈을 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공무원에 대한 직업 선호도는 높은 것 같습니다. 퇴임후 바로 유림 활동을 하셨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건가요?
그래요. 사단법인 광주·전남 충의사 현창회 사무국장으로 발령되었어요. 顯彰會는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등 조선시대 5대 난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忠義士를 추모하고 현창하는 단체지요. 2014년 국고 10억원을 지원받아 전남 담양군 창평면의 고광순 의사 기념사업회 부지에 충혼탑을 세우고 충의사 2115위의 위패를 모셨지요. 우리 조상도 왜란 15위, 호란 10위, 이괄의 난 4위, 이인좌의 난 1위 등 30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음 5월29일 호남의병의날에 광주,전남 유림과 충의사 후손이 모여 향사합니다. 나는 사무국장 13년을 보내고 이사 감사로 계속 참여해요. 후손된 도리지요.
#.유도회 사무국장은 언제부터 근무하셨던가요?
현창회 입사 3년뒤에 겸무 발령 되었어요. 두 단체가 같은 건물 상하층에 있고 업무 내용이나 규모로 보아 겸무가 가능했어요.
성균관 분헌관
#. 유림 경력이 화려하시던데요. 어떤 직책들을 맡으셨나요?
儒道會 사무국장 7년 동안에 얻은 것이 많았어요. 첫째는 광주,전남의 유림대표,한학자들과 오랫동안 친교를 맺어 인적재산이 풍부해요. 둘째는 상부기관인 성균관과 유도회 총본부로부터 신임을 받아 출입이 자유스러웠어요. 셋째는 누린 직책이 다양했습니다. 성균관의 전학, 전의, 사정위원, 중앙 상무위원, 석전대제 분헌관등이고 유도회는 중앙상임위원, 실천예절 지도사(공인 자격증 취득)로 활동했어요. 우리 종친중에서도 尙復(상주영장공파 종손,前여수향교 전교) ,耿良(前장흥군 산림조합장), 哲良(前장흥문화원 부원장), 聖太(前장흥향교 전교)씨등이 성균관 임원을 역임했지요.
#. 우리종친들에게도 영향이 미치었군요. 그리고 毅齋公 頌詩集 발간을 주도하셨는데 그 내용을 말씀해 주세요.
2009년 공의 기적비를 제막하는 자리에서 송시집을 발간하자는 여론이 제발하면서 업무 추진은 내 몫이 되었습니다. 공께서는 성균관과 유도회의 고문, 호남절의록과 전남도지 발간 도유사, 충남 문충사와 죽림서원 창건 임원 등을 역임하시며 평생 사문진작과 우리 조상 현창에 진력하셨습니다. 성균관장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림대표,한학자,종친등 200여명으로부터 귀한 시문을 얻어 송시집을 간행하며 발문을 남겼지요.
의재공 송시집(페이지200)과 판서공파 운곡종중 가승(페이지210)
#. 판서공파 雲谷宗中 家乘 을 만드셨는데요. 운곡종중 가승을 만드신 배경과 의미는 무엇이신지요?
운곡공은 28세로 판서 종가에서 분가하셨는데 나의 고조이십니다. 그 후손중에 족보가 없는 집이 많고 외국에서 사는 자손이 있으며 시대의 변화로 조상숭배정신이 점차 흐려지고 있어 뿌리나 잊지 말라고 만들어서 나누어 주었어요. 족보를 복사해서 시조공으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의 世系를 이었고 폐지된 호적(제적) 등본을 첨부했어요. 가승을 만들면서 운곡종중이라 이름 붙혔어요.
#.방촌 유물전시관에 도서 기증을 하셨지요.
몇권 되지도 않고 보관할 가치가 있는지는 몰라요. 집에 두는 것 보다는 그 쪽이 맞다 싶어서 보냈어요. 종친들에게도 유물의 기증을 권하고 싶어요.
#. 끝으로 후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도문회와 대종회는 하나다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싶어요. 언젠가 松潭회장이 도문회는 뿌리요 대종회는 가지와 잎이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根本固而枝葉茂 라는 글귀가 있어요. 뿌리가 견고하면 지엽이 무성하다는 뜻이지요. 역으로 지엽이 무성한 나무는 뿌리도 튼튼하겠지요. 아주 평범한 말이지만 음미하면서 튼튼한 우리나무를 肥培 管理하는데 도문회와 대종회가 뜻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